[수입] 쇼팽 : 녹턴 전집 [2 for 1] - DUO
쇼팽 (Frederic Chopin) 작곡, 마리아 후안 피레스 (Maria Joan Pi / DG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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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스가 연주하는 녹턴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선물하기 위해 산 것인데, 아쉬운 것은 오리지널 커버가 아니라는 점. 그런 점을 감안해 가격이 저렴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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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바흐 :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투렉 (Rosalyn Tureck) / VAI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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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봤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단연 압권이다. 마음이 매우 안정되는 느낌. 연주가 부드럽고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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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된 독자 -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양병찬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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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큼이나 근사했으면 좋았을걸. 부산에 문상차 가던 기차안에서 읽고 난 후 들었던 아쉬움이다. 유일하게 빌려본 책인데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뭔가 어거지로 짜맞춘 느낌, 문체며 구성, 내용 모두 불만족스러웠다. 고전을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가지 있겠지만 이런 식의 끌어맞춤이란 원작을 욕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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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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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휴가 때 서점에 들렀다 가볍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자 집었던 책이다. 늦었지만 읽은 소감을 세가지 관점에서 남겨본다.

1. 시간을 대하는 자세

옛말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다. 언뜻 수긍이 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족한 면도 있다. 동 격언이 쓰이는 경우란 보통 어떤 행동을 결정할 때인데, 나중에 그 결정을 지속 이행하지 못할 때는 외려 자기변명의 구실로 작용하기도 한다. ‘애당초 늦은 시점이었으니깐.’ 그래서 나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었다고 말한다. 이 말의 본뜻은 어떤 선택이 관습적으로 정해지는 ‘때’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본인이 원하는, 좋아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지스가 76세에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 그녀의 일생내내 본인이 하고자하는 일을 스스로 충실히 해왔던 것처럼. 요컨대, 어떤 결정은 시간에 얽매일 필요는 없고, 다만 스스로 진심으로 원하고 좋아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2. 행복의 기준

가끔 나는 내 생에 언제가 가장 행복했었던가 자문하곤 한다. 그때마다 선명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매우 어릴적 한 여름 마당 평상에 앉아 가족들과 점심을 먹던 그날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때는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도 못했다. 아마도 빈약한 찬이었지만 부모님과 두 누나들과 오손도손 함께 웃고 즐겼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너무 진부한 말이지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비트 코인이며, 부동산이며, 로또며 비슷하거나 좀더 어린 층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며 눈에 불을 켜는 요즘의 모습이 좀 딱하게 보이기도 한다. 모지스는 시골 대가족의 장녀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식모살이를 시작하고, 유명세를 타기 전까지 농장에서 갖은 육체 노동을 해왔지만, 그녀의 대부분의 그림은 바로 그때, 그 장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녀가 그런 시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시간들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고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일확천금에는 안타깝게도 바로 그러한 ‘과정’이 없다.

3. 이런 책을 대하는 자세

이런 류의 책은 순간적으로 의지를 복돋기도 하지만 이내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면도 있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나는 뭐람.’ 나는 회화를 평할 능력은 없지만, 솔직히 모지스의 그림이 그리 멋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비싼 돈주고 살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참 따뜻하고 동심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좋았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 행복은 과정에서 더 크게 얻는다는 점을 깨달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글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내용들, 아줌마 말투식의 번역(내가 몹시 싫어하는 말투다). 평점을 낮게 준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모지스 할머니의 삶 자체는 별 열개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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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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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 이중 존재양식이란 무엇을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이다. (34, 38쪽)

환언하자면 존재적 실존양식이라 함은 생동감, 능동성 및 몰입을 바탕으로 삶과 세계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으로, 소유 중심적 삶에서 나타나기 마련인 주체와 객체 간의 죽어있는, 수동적이며 피상적인 관계 지향적 방식과는 크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예컨대, 소유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이란 그 대상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것인 반면, 존재양식에서는 그 대상을 배려하고 알고자하며, 그에 몰입하고 그의 존재를 입증하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내포하는 의미로서 그 대상을 소생시키고 생동감을 증대시키는 이른바 소생과 생장의 과정이다. 따라서 사랑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 자리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 속에 수동적으로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73~75쪽 재구성)

삶의 방식이 소유 중심적이어야 하는냐 존재 중심적이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란 모름지기 행복 추구의 본능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물론 행복을 어떻게 칭하느냐는 사람, 문화, 학문분야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경제학에서는 효용(utility)을 행복과 동의어로 간주하면서 주어진 재원 하에서 최대의 효용을 낳는 행동을 합리적 선택으로 정의 내리기도 한다.

그러한 면에서 소유 중심적 삶도 행복을 추구하는 하나의 양식으로 존중될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또는 위대한 철학자나 선지자들의 잠언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 있다면, 그것은 이 같은 소유 중심의 방식이 행복의 최대치를 또는 지속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무언가를 열렬이 갖고자 했으나 막상 내 소유가 되어보니 그 기쁨과 만족도 잠시 뿐 어느새 씁쓸함과 공허함을 맛보고, 이내 새로운 대상을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자기 자신을 모두 경험한 바 있으리라. 어쩌면 그런 삶이란 쇼펜하우어가 말한 바대로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소유 중심적 삶도 인간의 본능의 행복 추구를 위한 하나의 방편일수는 있으나 그런 방식으로 얻는 행복의 느낌이란 -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아니, 그나마 그 정도에서 그치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한 없이 더 소중한 가치들까지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소유 중심적 삶에서는 지향하는 관점이 현재에 있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얽매여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지 못함을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망으로 연결 짓거나, 막연하나마 미래 불확실한 희망에 의존하여 살아가려 하지 않는가. 그러다보면 정작 중요하고 확실한 현재는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거나 희생할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의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면, 존재는 반드시 시간의 외곽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차원은 아니다. 사랑의 체험, 기쁨의 체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체험은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지금, 여기는 영원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존재적 실존양식에서 우리는 시간을 존중하되 시간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이 지배할 때는 시간에 대한 존중이 굴복으로 변한다. 즉 소유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인 반면, 존재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폭군의 될 수 없는 것이다.(185~187쪽, 재구성)

적지 않았으되, 길다고 느끼지 못한 지난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내 자신도 소유 중심적 삶을 영위해왔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얽매였던 시간이 대부분인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내 자신의 발전 동인(動因)이 된 측면도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내 자신에 대한 불만족, 딱히 특정 지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원망으로 점철된 시간된 많았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다보니 그때 그때의 삶이 희생되었고 따라서 행복감도 많이 느껴보지 못한 것도 같다.

지난 연말부터, 아니 지난해 내내 어쩌면 나는 이 대답을 찾고 있었던 듯싶다. 현 시점에서 곰곰이 짚어보면 나는 참 과분하게 많을 것을 가지고 있다. 따뜻하고 소중한 사람들, 서툴지만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나의 신념과 감정들, 도드라지진 않지만 그래도 종종 유용했던 나의 장점들. 이처럼 행복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나는 현재 가지고 있지 못한, 갖기 어려운 조건들에 얽매이면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정말이지 그간 나는 물질적으로 가난하였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빈궁하였던 셈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내 자신, 나의 마음가짐에 있었던 것이었다. 달라지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이 앞으로 남은 내 삶에 있어 또 다른 이정표로 남아있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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