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 이중 존재양식이란 무엇을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이다. (34, 38쪽)

환언하자면 존재적 실존양식이라 함은 생동감, 능동성 및 몰입을 바탕으로 삶과 세계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으로, 소유 중심적 삶에서 나타나기 마련인 주체와 객체 간의 죽어있는, 수동적이며 피상적인 관계 지향적 방식과는 크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예컨대, 소유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이란 그 대상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것인 반면, 존재양식에서는 그 대상을 배려하고 알고자하며, 그에 몰입하고 그의 존재를 입증하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내포하는 의미로서 그 대상을 소생시키고 생동감을 증대시키는 이른바 소생과 생장의 과정이다. 따라서 사랑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 자리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 속에 수동적으로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73~75쪽 재구성)

삶의 방식이 소유 중심적이어야 하는냐 존재 중심적이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란 모름지기 행복 추구의 본능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물론 행복을 어떻게 칭하느냐는 사람, 문화, 학문분야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경제학에서는 효용(utility)을 행복과 동의어로 간주하면서 주어진 재원 하에서 최대의 효용을 낳는 행동을 합리적 선택으로 정의 내리기도 한다.

그러한 면에서 소유 중심적 삶도 행복을 추구하는 하나의 양식으로 존중될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또는 위대한 철학자나 선지자들의 잠언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 있다면, 그것은 이 같은 소유 중심의 방식이 행복의 최대치를 또는 지속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무언가를 열렬이 갖고자 했으나 막상 내 소유가 되어보니 그 기쁨과 만족도 잠시 뿐 어느새 씁쓸함과 공허함을 맛보고, 이내 새로운 대상을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자기 자신을 모두 경험한 바 있으리라. 어쩌면 그런 삶이란 쇼펜하우어가 말한 바대로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소유 중심적 삶도 인간의 본능의 행복 추구를 위한 하나의 방편일수는 있으나 그런 방식으로 얻는 행복의 느낌이란 -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아니, 그나마 그 정도에서 그치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한 없이 더 소중한 가치들까지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소유 중심적 삶에서는 지향하는 관점이 현재에 있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얽매여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지 못함을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망으로 연결 짓거나, 막연하나마 미래 불확실한 희망에 의존하여 살아가려 하지 않는가. 그러다보면 정작 중요하고 확실한 현재는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거나 희생할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의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면, 존재는 반드시 시간의 외곽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차원은 아니다. 사랑의 체험, 기쁨의 체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체험은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지금, 여기는 영원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존재적 실존양식에서 우리는 시간을 존중하되 시간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이 지배할 때는 시간에 대한 존중이 굴복으로 변한다. 즉 소유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인 반면, 존재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폭군의 될 수 없는 것이다.(185~187쪽, 재구성)

적지 않았으되, 길다고 느끼지 못한 지난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내 자신도 소유 중심적 삶을 영위해왔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얽매였던 시간이 대부분인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내 자신의 발전 동인(動因)이 된 측면도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내 자신에 대한 불만족, 딱히 특정 지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원망으로 점철된 시간된 많았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다보니 그때 그때의 삶이 희생되었고 따라서 행복감도 많이 느껴보지 못한 것도 같다.

지난 연말부터, 아니 지난해 내내 어쩌면 나는 이 대답을 찾고 있었던 듯싶다. 현 시점에서 곰곰이 짚어보면 나는 참 과분하게 많을 것을 가지고 있다. 따뜻하고 소중한 사람들, 서툴지만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나의 신념과 감정들, 도드라지진 않지만 그래도 종종 유용했던 나의 장점들. 이처럼 행복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나는 현재 가지고 있지 못한, 갖기 어려운 조건들에 얽매이면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정말이지 그간 나는 물질적으로 가난하였다기보다는 정신적으로 빈궁하였던 셈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내 자신, 나의 마음가짐에 있었던 것이었다. 달라지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이 앞으로 남은 내 삶에 있어 또 다른 이정표로 남아있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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