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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ㅣ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평점 :
오래 전, 남편이랑 이른 아침에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사고를 목격했습니다. 바로 앞서 달리던 차였는데 졸음운전을 했는지 1차선으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2차선을 넘어 3차선으로 가더니 갓길턱에 부딪혀 옆으로 누워서 한참을 미끄러졌어요. 너무 놀라 뒤에 차를 세우고 남편은 내려서 그 차로 달려갔고 저는 무서워서 멀리서 지켜만 봤어요. 조금있다 다행스럽게도 뒷좌석에서 아이들 둘이 내렸고 운전자분도 내렸어요. 근데 앞좌석 오른쪽에 타고 계셨던 운전자분의 부인이 열린 창문으로 머리가 나와서 그대로 즉사하셨나봐요. 차가 오른쪽으로 넘어졌거든요. 저는 언뜻 보긴 했지만 자세히는 못봤는데 남편은 도와주느라 너무 자세히 봐버린겁니다. 그후 일주일동안 남편이 밤에 잠을 못자고 악몽을 꾸더라구요. 10년도 훨씬 지난일인데 아직도 교통사고 하면 그 사고가 기억이 납니다. 오늘 다시 생각해보니 참 신기합니다. 그 당시를 떠올려 보면 사고가 나던 순간, 차가 미끄러지며 넘어지던 순간, 아이들이 차창으로 빠져나오던 순간, 남편이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며 소리 지르던 그 목소리까지...이 모든 순간들이 정말 한장한장의 사진처럼 자세히 기억이 나거든요. 우리의 머릿속은 대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기억하는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인 에이머스 데커는 책 제목처럼 정말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머릿속에 마치 녹화된 영상이 저장되어 있는것 처럼 몇년 몇월 몇일을 생각하면 그 당시의 일들을 찍은 영상이 좌라락 지나갑니다. 일명 "과잉기억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이런 병명이 있는건지는 모르겠어요. (방금 검색해보니 정말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있는 사람들이 있긴 있네요.) 간단히 생각하면 참 좋겠다 싶은 특징이지만 또 어찌보면 정말 머릿속이 복잡하고 어지러울것 같아요. 만약 내가 데커였다면 어쩌면 일찌감치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너무 많아서..ㅋ 2미터 장신에 100킬로의 거구 데커는 한때 미식축구 선수였습니다. 미식축구 경기도중 동료와 심하게 부딪혔는데 그 이후 장애아닌 장애를 앓게 된거죠. 사고 이후, 데커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만 모아서 연구 또는 치료를 하는 시설에서 살아왔고, 경찰이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이 능력으로 데커는 형사진급 시험에서도 수석을 했고 형사가 된 뒤로도 그의 능력은 범인을 검거하는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분명 데커에게 축복같은 능력이 아닐 수 없죠. 하지만 근무를 마치고 귀가한 어느날, 데커의 집은 쑥대밭이 되어 있습니다. 아내와 처남, 그리고 딸까지 무참히 살해된채 뒹굴고 있는 시체 3구. 자신의 모든것이었던 가족이 아무 이유없이 무참히 살해 당하자 데커는 삶의 의욕도 사라집니다. 방탕한 생활로 버텨온, 2년여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레오폴드라는 한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세사람을 살해했다고 자백을 합니다. 데커의 눈에 레오플드는 절대 누군가를 죽일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는 레오폴드를 보며 또다른 공범이 있거나, 어디서 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죠. 책을 읽으며 저도 정말 레오폴드는 어디서 줏어 들은얘기를 하는걸까, 연기를 하는걸까 감을 잡을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데커가 졸업한 맨스필드 고등학교에서는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을 하는데요. 과연 레오폴드가 나타난 이 시점에 총기사건이 발생한건 무슨의미일까요. 두 사건은 전혀 연관이 없어보였으나 파고들수록 데커의 가족이 살해당한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음이 밝혀집니다.
오...이 책 괜찮네요. 데커나 동료형사였던 랭커스터나, 연방수사국의 보거트, 그리고 저널리스트 출신 재미슨. 캐릭터들이 다 괜찮은거 같아요. 보거트나 재미슨은 이 책에서 그다지 큰 존재감은 아니었지만 만약 연방수사국에서 다시 의기투합하여 일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면 꽤나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왠지 시리즈가 나올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 범인을 쫓아 한발한발 거리를 좁혀가는 데커의 추리력은 그의 특별한 능력으로 한층 빛을 발해 무척이나 흥미진진합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 범인이 어떻게든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기분일까요. 워낙에 특이한 경우이다 보니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유대감을 느끼는 것을 보면서 평범한것이 정말 큰 축복이구나 하는걸 느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처지였다. 사고를 겪었고, 같은 병을 앓게 되었고, 트라우마 가득한 굴곡진 인생을 살고 있었다. (418쪽)
그는 학술지에 실리고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을 만한, 수십 억분의 일 꼴로 발생하는 극히 희귀한 사례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괴물 같았다. 별안간,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단 몇 분 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죽을날까지 이대로 쭉 살아야 했다. 낯선 사람이 그의 몸과 마음, 인생을 무단으로 점거 했는데 쫓아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분이었다. (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