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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ㅣ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몇 해전, 코맥 매카시의 "로드"란 책을 읽을때 정말 내용이 센세이셔널 하다는걸 실감하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전엔 그와 비슷한 종말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기도 했거니와 책을 읽는 동안 시종일관 암울함이 내 주변을 감싸 우울해지면서도 이걸 놓을 수 없는 몰입감에 참 놀랍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화재로 인한 잿빛세상의 이미지로 부터 오는 흑백의 대비만 상상이 되었거든요. 오늘 읽은 <스테이션 일레븐>도 같은 맥락의 종말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로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모든것이 불타버린 로드와는 달리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 버린 문명의 몰락이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책은 표지에서도 느껴지지만 흑백의 암울함이 아닌 주홍빛의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할리우드 배우 아서가 [리어왕] 공연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파파라치였던, 응급구조사 자격이 있는 지반이라는 인물은 무대위로 뛰어올라가 의사가 도착할때까지 아서에게 응급조치를 취합니다. 그리고 의사가 도착한 뒤 지반은 무대 한쪽에서 울고있는 어린 아역배우 커스틴을 위로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 의사로 일하는 친구로부터 "조지아 독감"이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치사율 99.9%의 조지아독감은 무서운 속도로 지구를 잠식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렇게 인류의 종말을 맞는 지구. 그리고 20년 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무서운 전염병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으니.
스테이션 일레븐은 아서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미란다가 엮은 만화책의 제목입니다. 이 책은 문명이 몰락하기 전에서 문명이 몰락한 후까지 쭉 이어지며 여러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문명의 종말을 맞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과 문명의 종말을 맞은 후 태어난 사람들이 있는데요. 문명이 몰락한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길거리에 버려진 자동차가 있지만 저것이 과연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문명속에서의 문맹인것이지요. 20년후의 이야기를 주로 이끌어 가는 인물은 아서와 함께 [리어왕]에 아역배우로 출연했던 커스틴이라는 인물인데요. 유랑악단에 입단하여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라는 캐치를 내걸고 북미를 떠돌며 셰익스피어 희곡공연을 합니다. 이 책은 아서라는 인물과 그 주변 인물에 대한 과거 문명 몰락 전의 이야기와 커스틴을 비롯한 그 주변 인물에 대한 현재 문명 몰락 후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전개가 되는데요. 서로가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이곳 저곳에 산재해 있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하나로 딱 귀결이 될때의 그 통쾌함이란!
전기가 없는 불편함을 전혀 모르는 요즘 아이들.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뭐든 할 수 있는 요즘 세상. 그 모든것이 한순간에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과연 우리는 몇일을 버틸 수 있을까요. 알게 모르게 우리 삶의 깊은 곳까지 침투해버린 문명이라는 것이 있을땐 고마운줄 모르지만 단 한 순간만이라도 우리곁에서 없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아마 대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루쯤은 이 모든것들에서 벗어나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것 같아요. 비록 이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지만 과연 우리의 현실은 해피엔딩이 될 수 없을겁니다. 단연코.
그는 닷새나 혼자 걷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만났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다는 게 크게 안심이 되었지만 ㅡ 그는 무법천지를 상상했었고 배낭을 빼앗기고 아무런 생필품도 없이 죽어가는 것을 수천 번도 넘게 싱싱했었다 ㅡ 날이 갈수록 공허함이 뼈 속 깊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조지아 독감은 지극히 효율적이어서 인간을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 (2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