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사들의 탐정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안녕, 긴 잠이여>를 만나면서 하라 료 작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안녕, 긴 잠이여>는 그 전 작품인 <내가 죽인 소녀> 다음으로 무려 4년의 공백을 깨고 나온 아주 귀한 작품이었죠. 도대체 언제 나오냐고 문의가 쇄도하던 그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참으로 귀한 책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출간된 하라 료 작가의 책은 오늘 읽은 <천사들의 탐정>을 포함하여 총 4권밖에 되지 않습니다. 1988년 데뷔이래 에세이와 단편집, 네 편의 장편소설 모두해서 총 6권밖에 쓰지 않았다니, 참 귀하긴 귀한 책이네요. 시기적으로 봤을 때, <천사들의 탐정>은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와 <내가 죽인 소녀> 다음으로 출간 순서가 되는것 같습니다. 수도꼭지만 틀면 글이 술술 나온다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처럼은 아니더라도 좀 팍팍 써 주셨으면 좋겠는데, 좀 많이 아쉽습니다.
단편은 왠지 잘 안 읽힙니다. 장편은 중간에 좀 지루하더라도 읽다보면 탄력받아 쭉쭉 나가는데 단편은 이제 좀 시작하려나 하면 끝나버리는 아쉬움이 많아서 잘 읽지도 않을뿐더러 지금까지 읽어왔던 단편들중에 썩 마음에 드는 작품도 그다지 없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의 탐정>은 의외로 재미있게 읽혀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 작품집에는 모두 6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특이한건 6편 모두 10대 소년,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또는 의뢰인으로 등장을 합니다. 초등학생 소년이 총을 가진 자신의 아버지로 부터 엄마를 지키기위해 사와자키 탐정을 찾아온 "소년이 본 남자". 딸의 뒷조사를 의뢰한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난잡한 사생활을 뒤쫓고 있었던 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240호실의 남자". 그리고 새벽 1시에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 잘못 걸려온 전화였지만 아이돌 여가수인 소녀는 잠시후에 자살을 할 거라는 충격적인 말을 남기는데..."이니셜이 M인 남자" 등 6편 모두 스토리도 탄탄하고 사와자키 탐정의 매력도 한껏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식을 잃은 남자"라는 단편에는 한국인이 주인공으로 등장을 하는데요. 일본소설에 등장하는 한국인은 또 새로운 느낌입니다.
계획적인 추리보다는 사건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 문제를 해결하는 하드보일드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단편집이라 하드보일드한 느낌은 좀 약한듯 하지만 그래도 흔히 보아왔던 탐정소설과는 좀 다른맛이 느껴질 것입니다. 시크하고 냉철하지만 따뜻한 인간미 또한 가지고 있는 사와자키 탐정. 스릴러물에 등장하는 상남자 형사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기에 기나긴 기다림을 감내하고서라도 수많은 팬들이 열광하지 않나 싶습니다.
낡은 블루버드를 타고 필터가 없는 잎담배를 피우는 마초스타일 사와자키. 만사에 무심한듯 하지만 자기가 맡은 일에서만큼은 냉철하고 예리한 사고력을 발휘하는 탐정. 이번 단편집에서는 어린아이에게까지 고용당해서 탐정일을 해야 하냐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사건을 파헤칠땐 10대인 의뢰인도 한 사람의 인격으로 존중해주는 멋진남자. "탐정은 그냥 직업이야. 뭔가 수상하고 야비하고 하찮은, 그런 직업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그런 직업이라는 각오도 되어 있지 않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지" 탐정이 되고 싶어 찾아온 아이에게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해 주는 사와자키. 그가 비록 직업일 뿐이라고 말하는 탐정이, 그에게는 과연 진짜 직업일뿐일까요. 내가 봤을땐 운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