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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아! 이 책은 10년전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되었었던 책이었네요. 저는 물론 이 책을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접하지만, 하루키쌤을 애정하는 많은 독자분들은 이미 한번쯤 접해 보셨으리라 생각이 되네요. 사실 전 처음으로 읽은 하루키쌤의 책이 "1Q84"인데요. 그 외에는 모두 에세이로 접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소설로는 두번째 되겠네요. 에세이는 그 나름대로 작가의 일상생활을 엿보듯 자연스러움이 있어서 좋았지만, 소설은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읽어본 바로는 에세이보다는 소설쪽이 조금 더 나은것 같아요. 물론 어렵지 않고 저한테 잘 맞는 소설만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소설은 뭔가 여느 소설들하고는 다른점이 있습니다. 우선 화자가 어떤 제3의 관찰자입니다. 책 속에선 카메라로 표현을 했는데요.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주인공을 여러 각도에서 비추는 카메라처럼 책 속 등장인물들을 여러각도에서 보여줍니다. 그 카메라가 어쩐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달리 보면 영화나 광고를 보는듯한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백설공주 같은 미모로 곱게 자란 언니 에리와 머리는 뛰어 나지만 언니에 비교되는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진 동생 마리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자정을 몇분 앞둔 11시 56분. 카메라는 한 소녀를 비춥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카페안 많은 사람들 틈에서 커피한잔을 앞에두고 느긋하게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소녀. 바로 19세소녀 마리입니다. 집으로 가기 싫어 밖에서 밤을 새우기 위해 찾은 카페에서 마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카메라는 언니인 에리를 비춥니다. 사실 에리를 비추는 카메라는 도대체 무얼 얘기할까 한참 고민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늘 동생인 마리보다 과분한 대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란 에리이지만 그녀 나름 많은 고민과 고충과 힘듦이 있었겠죠. 하지만 그 모든것을 풀어 버릴데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녀는 모든걸 내려놓고 긴 잠을 택한 겁니다.
독자들 또한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여러 인간군상을 만나게 되는데요. 젊은 남녀, 자매, 셀러리맨, 그리고 암흑가의 사람들등 여러 인간군상을 통해 사회의 일면들을 옅보게 됩니다. 겉으론 엘리트인 셀러리맨이 아무렇지 않게 아내와 통화를 하면서 그 이면으로는 사창가의 여자들에게 이유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중성을 보면서 이것이야 말로 우리사회의 숨겨진 일면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요즘은 현실의 이야기가 영화나 소설속의 이야기보다 어쩌면 더 영화나 소설스러우니까요. 에리와 마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 되지만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자정을 앞둔 11시 56분 부터 다음날 아침 6시 52분까지 단 일곱 시간에 일어난 일들을 내용으로 한 이 소설은 왠지 잠들지 않는 사람들의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한층 우울하고 외로운 느낌입니다. 더불어 소설 곳곳에 배경음악처럼 깔려있는 수많은 음악들을 함께 음미하며 읽을 수 있다면 더 한층 풍부한 깊이를 느낄 수 있을듯 합니다. 이 책은 2005년 출간 당시엔 기존의 하루키식 작품들과는 두드러지게 다른 소설적 구조를 보여주어 하루키문학의 획기적인 전환이라고 평가를 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만약 그런 연료가 나한테 없었다면, 기억의 서랍 같은 게 내 안에 없었다면, 난 이미 오래전에 반 동강 났을 거야. 소중한거, 시시한 거, 이런저런 기억을 그때그때 서랍에서 꺼낼 수 있으니까 이런 악몽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도 그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201-2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