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분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값이 터무니없이 높아 무서울 지경이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용을 죽여야만 하는 것일까.





국적도, 연도도 알 수 없는 어느 시기의 어느 세상의 어느 인간(혹은 종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판타지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드라마는 빛을 발한다. '남아 있는 나날'과 상통하는 면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이 훗날 회고를 통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반성, 자기 성찰 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여기서는 암흑의 시대를 무력과 전쟁으로 종결지은 아더 왕의 역사가 등장한다. 무력과 전쟁, 피와 폭력으로 성취한 평화와 영광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무력으로 성취한 평화는 언제든 무력으로 다시 깨질 수 있다. 이쪽 종족이 모조리 죽어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저쪽 종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쪽 종족이 남아 있으면 이쪽 종족의 평화는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 완전한 평화를 위해서는 저쪽을 완전히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폭력과 죽음으로 점철되는 전쟁과 평화. 반복되는 전쟁과 평화 속에서 쓰이는 피의 역사. 작가는 이 피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독자로 하여금 바라보고, 상기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아들의 마을을 찾아 떠나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등장한다. 그들은 망각의 입김을 지닌 용의 횡포로 인해 과거의 기억들을 잊고 살아간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지만 서서히 기억이 돌아올수록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잊었던 기억은 잊었던 역사를, 잊었던 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망각 속에서 건져진 기억들은 모조리 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때 칼을 쥔 내 손으로 어린 소년에 불과한 적병의 목을 친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평화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젊은이들의 육신을 베고, 찌르고,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이며 수많은 어린아이들과 젊은 부인들에게서 아버지와 남편을 앗아간 일이 과연 잘한 일이었던가.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런 만행들이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만행은 되풀이될 것이다. 피의 역사는 번복되지 않으면, 반복된다. 

액슬은 괴로워한다.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면 역사도 부정된다. 평화의 의미도 퇴색된다. 기억과 망각의 기로에서 액슬은 고민과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용의 처단을 두고 늙은 기사와 젊은 전사가 대립하는 소설의 절정 부분에 있다. 

늙은 기사는 용을 지키고 싶어 하고, 전사는 용을 죽이려 한다. 망각을 유지하려는 자와 기억을 일깨우려는 자. 피의 역사를 덮으려는 자와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자. 기사와 전사의 마지막 싸움은 읽는 이를 숨 막히는 전율로 몰아간다. 

피로 승리를 쟁취하고, 피로 역사를 세운 장본인은 역사의 전권을 손에 쥐는 순간 '피'는 지우고 '역사'만 남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울 수만 있다면 '피'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모조리 지우려 드는 것이다. 그에게는 망각의 입김을 내뿜는 용이 필요한 것이다. 용의 죽음은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는 다시 깨진다. 피 흘리며 죽어간 종족의 후예들이 눈을 뜨는 순간 다시 세상에는 피가 뿌려진다. 그래서 늙은 기사는 이미 병들고 지친 용을 끝까지 지켜주려 하는 것이다. 

작품은 결말로 갈수록 깊은 비애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강하고 무서웠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  쇠퇴하고 몰락하기 마련이다. 한때 사바나를 주름 잡았던 건강한 수사자도 시간이 흐르면 늙고 병들기 마련이고, 결국 또 다른 젊은 수사자에게 무리를 빼앗기고 쫓겨나거나 죽음을 맞는다. 목숨을 걸고 용을 지키려는 늙은 기사의 모습은 목숨을 걸고 용을 죽이려는 젊은 전사의 먼 훗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전사도 나이 들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을 부수고 없애고 싶어 하는 누군가와 맞서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잔인한 것이고, 역사는 잔인한 시간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며 상처와 후회의 그림자를 남긴다. 

역사 속에 깃든 망각의 그림자들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망각의 그림자 속에 덮힌 핏자국들을 다시 일깨워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만들어갈 역사의 줄기 속에는 더 이상 핏자국도, 그것을 덮을 망각의 그림자도 없을 거라 자신할 수 있을까.    

이 쓸쓸한 판타지를 통해 작가가 던진 질문들은 간단하다면 간단할 수도 있는데 나는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 읽어본다
남궁인 지음 / 난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유명인인지는 모르겠는데, 스스로 유명인(혹은 잘난 인간)이라 자부하는 듯한 모습은 책 속에서 심심찮게 엿볼 수 있었다. 그런 자만심이 없었다면 정말 성실한 독서가의 블로그만도 못한 글귀들을 모아 책으로 낼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작과 비평 184호 - 2019.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만부 팔아준 작가 버리지 못하는 창비의 장사꾼 민낯. 비평이라는 이름은 떼버리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년은 언제나 휠체어에 누워 잠들어 있는 소녀가 궁금했다. 

그녀가 언제 눈 뜰지, 언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마주하게 될지. 

어느 날 소녀는 사라지고, 긴 시간이 흐른 후 소년은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소녀와 재회하게 된다.

    

‘인어가 잠든 집’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을 통해 삶과 죽음의 정의, 그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 등을 두루 고찰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작 ‘공허한 십자가’에서 사형 제도를 깊이 고찰한 바 있다. 이번에는 뇌사를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뇌 기능 정지에 해당하는 뇌사 판정이 곧 사망 판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아직 심장이 뛰고, 인공호흡기를 통해 숨을 쉬고, 혈관을 따라 피가 돌고 있는 육신을 한순간에 무생물 취급 할 수 있는 걸까. 뇌사 판정을 받은 이가 바로 당신의 가족, 당신의 자식이라면...? 순순히 사망 판정에 동의하고 아직 심장이 뛰는 가족의, 자식의 육신을 담담히 관에 넣을 수 있을까.

반대로 아직 심장이 뛰고는 있지만 뇌가 기능을 멈췄고, 육신이 움직임을 멈춰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를 과연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를 아직도 가족이라고,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언제까지나 옆에 끼고 살아갈 수 있을까. 평생을 뇌사 상태로 식물인간처럼 병상에 누워 있는 이에게 ‘삶’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작가는 여기에 장기 이식 문제를 더해 더욱 난감한 질문들을 던지며 독자를 궁지로 몰아간다. 

뇌사로 인간으로서의 삶과 기능은 끝났지만 아직 장기는 살아있다. 그 장기를 늦기 전에 누군가에게 이식한다면 죽어가는 다른 생명을 온전히 살릴 수도 있다. 하나의 육신은 완전한 죽음을 맞지만 그의 몸에서 적출한 장기들로 죽어가던 다른 육신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포기하는 대신 그 사람으로 인해 다른 여러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다. 당신의 결정(뇌사를 받아들이고, 장기 이식에 동의) 여부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생명의 희비가 엇갈린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떤 선택이 바람직한 선택이며, 후회 없는 선택이 될까. 뇌사에 빠진 내 가족을 ‘죽음’으로 인정하고 그 장기를 적출해 죽어가는 다른 이들을 살려내는 게 바람직할까. 아니면 아직 심장이 뛰고, 체온이 남아 있는 내 가족을 끝까지 살아있다고 믿으며 붙들고 사는 게 바람직할까.

 

작중 가오루코는 뇌사에 이른 딸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함께 있으려고 한다. 움직임을 멈췄고, 의식도 멈췄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딸을 끝까지 살아 있다고 믿으며 심지어 언젠가는 의식도 돌아오고 눈을 뜰 것이라는 헛된 기대까지 품는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누군가의 장기 이식을 간절히 바라며 생명을 잃어가는 자식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다른 부모들의 모습도 그려진다.

하나의 생명이 완전히 꺼져가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고통스럽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은 그 고통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 생명이 자식의 생명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럼에도 자식의, 부모의, 가족의 ‘죽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순간을 피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죽음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찰은 대단히 중요하다. 

소설을 통해서라도 그 순간을 경험하고 고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유가치할 것이다. 소설 문학의 순기능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작품을 통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그러나 언젠가는 경험할 가능성이 있는) 삶을 미리 경험하고, 느껴보는 일.

죽음을 고찰하는 것은 결국 삶을 고찰하는 일이며, 인간을 고찰하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을 고찰하는 일이며, 우주를 고찰하는 일이다. 고찰은 성찰로 이어질 것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더 넓고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