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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 소설가 중에서 김훈만큼 소설적 소재를 잘 선택하는 작가도 드문 것 같다. '칼의 노래'에서는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이야기를 다루더니, 이번에는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이야기다. 남한산성에 갇힌 임금이 마침내 삼전도로 나와 청에게 투항하기까지 한 달 보름간의 이야기다.
줄기를 이루는 서사는 평이하다. 그러나 서사 속에 담긴 뜻은 가파르다.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샌가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오는 산행처럼, 단순명료한 서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 샌가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뜨거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이 폭발하려는 순간, 서사와 인물들은 하나가 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틔이듯, 서사가 진행될수록 남한산성을 둘러싼 당대의 역사가 하나의 풍경이 된다. 신분도, 성격도, 사상도 제각각이던 인물들이 서서히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 고매한 정승들도, 우매한 민초들도 결국에는 나약한 인간으로 묶여진다. 그즈음 이미 감정은 식어, 한숨이 된다. 서사는 끝나고, 인간만 남는다. 남한산성에서 많은 이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고, 그렇게 죽어 갔지만, 그래도 살아 남은 인간들이 있다. 임금도 살아남고, 인간도 살아남는다.
인간은 나약하지만 질기다. 밟히고 쓰러져도, 한참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일어나, 잡초처럼 살아간다. 그래서 역사는 이어진다.
인조는 마침내 삼전도로 나와 청의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하지만, 기실 그보다 굴욕적인 것은 그 굴욕을 당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임금이 꼼짝달싹 못한 채 한달 보름동안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는 자체가 굴욕이다. 그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굴욕이다. 임금과 신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허한 언쟁만 벌였다는 것이 굴욕이다. 한달 보름동안 가슴을 쥐어뜯는 민초들의 고통을 못 본 척 했다는 것이 굴욕이다. 언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적의 총탄에 머리가 깨어지고, 다리가 잘려 나가고, 반병신이 된 몸으로 급식조차 외면당한 채 굶어죽고, 얼어죽는 병사들을 어찌하지 못 하고 그저, 지켜만 봤다는 것이 굴욕이다. 10만 청군으로 둘러싸인 남한산성 안에서 한달 보름동안 결국, 싸우지도 못하고, 수성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 한 채, 성안의 모든 것들이 말라 비틀어지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을 때, 마침내 항복이라는 하나의 선택밖에 남지 않았을 때, 비굴하고, 무력하게 그것을 취했다는 것이 굴욕이었던 것이다.
임금을 앞에두고 신료들이 벌이는 언쟁은 답답하다 못해 우습고, 우습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했다. 적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데, 답은 뻔히 나와 있는데, 최명길의 말처럼 길은 하나 뿐인 듯 싶은데, 어쩌자고 저들은 그 좁은 돌구멍 속에 틀어박혀 그 안에서 지들끼리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너희 군신이 그 춥고 궁벽한 토굴 속으로 들어가 한사코 웅크리고 내다보지 않으니 답답하다'고 토로하는 적장의 말에 오히려 수긍이 갈 정도였다.
저 아둔함과 한심함이 낳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그 과정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훈의 경이로운 문장 앞에서는 탄복을 금치 못한다. 문장의 힘이 서사를 압도한다. 옥토에서 작물이 왕성하듯 좋은 소재가 좋은 문장을 만나 힘찬 서사로 뻗어나간다.
김훈이 구사하는 언어는 동시대 작가들의 것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그가 휘두르는 언어의 칼은 서슬퍼른 무사의 칼이다. 그래서 그가 다루는 이야기도 무사의 칼로 다룰 수 있는(다룰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다. 무사의 칼로 요리나 바느질을 할 수는 없다. 또한 장작을 패거나, 들짐승을 사냥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무사의 칼은 수련을 하거나, 전장에서 사용되어져야 마땅하다. 스스로를 다스리거나, 타자를 다스리는데 사용된다. 김훈의 이야기가 그렇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의 칼로, 자신만의 언어의 칼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침을 흘리는 혹은 한 남자를 두고, 세 여자가 안달하는 따위의 요상한 연애담이나, 실연을 당하고, 술을 퍼마시고, 과거의 추억을 끝없이 상기하고, 눈물이나 찔찔 짜는 신파나, 한량들의 술주정 같은, 백수들의 잠꼬대 같은 공허한 농담 따위는 하지 않는다. 무사의 칼이 할 이야기가 아니다. 무사의 칼은 안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베거나, 앞으로 나아가 적을 베는 이야기를 한다. 간단하지만 명확한 힘이 실려 있고, 그래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다. 같은 말을 계속 곱씹고 주저하고 망설이고, 한자리를 맴도는 낯간지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비록 그 전모가 다 드러났다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장수 같은 기백과 찡한 박력이 살아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김훈의 문장과 서사에는 '아쌀한' 맛이 있다. 미지근하지 않고, 화통하다. 감동이 가슴을 찌르듯 직접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