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원의 아이 - 상 ㅣ 영원의 아이
덴도 아라타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구원은 없다.
텐도 아라타는 야마모토슈고로상 수상작인 '가족 사냥'을 통해 이미 가족에 대한 섬뜩한 고찰을 보인 적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혹독한 상처를 입히고 있는가. 가족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나 '가족 사냥'은 결국 전망부재의 파국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텐도 아라타가 보여준 가족의 초상은 참혹했으며, 문제의 답은 없었다. '구원'은 없었던 것이다.
'영원의 아이'는 '가족 사냥' 이후 3년 여만에 발표한 작품으로 다분히 '가족 사냥'의 연장선 상에 위치해 있다. 이 작품은 '가족 사냥'의 후속작처럼 보이기도 하며, 동시에 '가족 사냥'의 전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족 사냥'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은 부모를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거나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영원의 아이'는 그 반대의 이야기, 즉 부모로부터 엄청난 학대를 받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가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
보살핌이 필요한 나약한 어린 아이에게 가장 안전하고 믿음직스런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 인간이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구속과 제약의 틀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태어나서 처음 만나게 되는 '타인'들인 것이다.
가족이 안전과 믿음의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고 구속과 제약, 타인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순간 암담한 공포가 발화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아직 스스로를 제어할 힘도 사고도 부족한 어린 아이의 내부에서 발화할 경우 아이의 미래는 순식간에 검은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아무리 순수하고 애정어린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이 아이에게 예상치 못한 상처가 될 수 있고, 불유쾌한 기억으로 각인될 수 있다. 나는 순수하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가가지만 아이는 그것을 구속과 제약,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에게 억지로 밥을 많이 먹게 하는 행위, 집 안에서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억지로 집밖으로 내 몰아 여러 사람들 사이에 집어넣는 행위,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이끌고 교회에 가는 행위 등... 부모들은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아이의 행복과 가족의 화합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어른이 되어서까지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아이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광적인 집념이나 열정에 치우치다보면 어느 순간 시야가 좁아지고 편협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때문에 스스로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아이의 입장따윈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자신의 행위에 일체의 의심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행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대로 아이에게,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갈등을 조성하고 생채기를 입히게 됨을 알리 없는 것이다. 내 뜻대로 만들어가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노력하는 이 가족이, 아이들이 튼튼하고 행복하게, 제대로 성장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나중에야 그 실체를 제대로 보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후다. 더이상 손 쓸 방도가 없는 지경까지 와 버린 후에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어서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부모들이 있다. 나는 한다고 해 왔는데 왜 우리 가족의 모습이, 내 아이들의 모습이 이 모양이 되고 말았나... 이건 필시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건 분명 아이의 잘못이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내 말대로 제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너희들의 잘못이다. 너희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착각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가뜩이나 상처받은 아이들을 죄인으로 내몰기까지 한다. 이러니 결국 파국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가족 사냥'에서는 이런 파국을 맞은 가족의 모습을 흰개미에 점령당한 집에 비유해서 묘사한다. 애초에 흰 개미 몇 마리가 집으로 침투하면 집은 몰락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흰개미는 언제나 무너질 집에만 침투하는 것이고, 흰개미가 침투했다는 것은 곧 그 집이 무너질 것이라는 표식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처음 몇 마리가 들어왔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대대적인 구제작업을 벌인다면 집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흰개미가 벽 곳곳에 알을 까고 부화해서 수천, 수만마리로 늘어난 상태라면 구제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이제 해결 방법은 그 집 자체를 파괴시켜 버리는 것밖에 없다. 흰개미가 다른 집으로까지 옮겨가기 전에 말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차라리 완전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 갈등과 상처라면 해결 방법이 더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가족이라는 구속과 제약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옴짝달싹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모두의 파멸이라는 극단의 방법만이 문제 해결의 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원하든 원치않든...
'영원의 아이'는 5년이 넘는 준비와 집필 기간에 원고지 5천 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완성된 텐도 아라타 최고의 역작이다. 혹자는 이 작품을 두고 '이 책은 과소평가해서 올해 일본문학 베스트 1위, 그러나 진심을 말하자면 지난 10년 동안의 베스트 1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영원의 아이'는 재미와 작품성을 동시에 갖춘 중량감 넘치는 걸작으로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문학으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 지금까지 누적 판매부수 210만 부를 넘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며 일본에서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역대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가운데서도 가히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힐만 한데, 물론 이 작품은 본격 추리소설과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미스터리와 마지막 순간에 밝혀지는 반전과 진실은 독자를 흥분과 감동으로 이끌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흡인력 또한 대단하다. 국내 편집본으로 1500 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이야기는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이야기 속으로 완벽하게 빠져들고 만다. 이야기라기보다 세 명의 아이들 - 루핀과 모울, 지라프라는 인물들에 빠져들고 만다. 누구라도 루핀과 모울, 지라프의 가슴 아픈 삶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루핀, 모울, 지라프라 불리는 세 아이들 - 유키, 쇼이치로, 료헤이. 이들은 각자 부모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학대와 상처를 받고 소아과 정신 병동에서 만난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보이며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나눈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면서 살아갈 힘과 구원의 희망을 얻는다.
그리고 17년이 흐른다. 17년만에 각자 간호사, 변호사, 형사가 되어 재회하는 아이들. 이제는 아이라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어린 시절의 상처와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은 유효하지만 아직 가족은 병들어 있는 상태다. 각자의 가족들에 의해 파생되는 끊임없는 갈등과 문제들은 여전히 진행형이었으며, 거기다가 묻어 두고 싶었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되살아나며 세 사람을 수시로 괴롭힌다. 설상가상으로 범인을 알 수 없는 끔찍한 연쇄 살인과 무시무시한 방화가 터지면서 세 사람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사건은 원만히 해결되고, 그 아이들은 가족과 화해하고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될까...
'영원의 아이'의 첫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루핀과 모울과 지라프가 열두 살 아이였던 시절, 병원 퇴원을 앞두고 그들은 신의 산 꼭대기에 올라 빛나는 사람과 조우한다. 상처뿐인 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그 빛나는 형상을 바라보며 아이들은 다짐한다. 그들은 이제 곧 사람을 죽일 예정인 것이다. 이 오프닝은 묘한 기시감과 향수를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안타까운 운명을 예감케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차치하고 어린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고 무서운 것이다. 오죽 했으면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가족은 뭘 하고 있었던가. 아이들이 그런 끔찍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은 왜 아이들을 내버려 뒀나... 가족의 역할이, 가족의 힘이 어째서 아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가족은 대체...
가족은 아이들에게 상처와 공포만을 안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는 학대와 고통...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무서운 죄의식. 부모들은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그 원인을 아이 때문이라고 한다. 끔찍한 죄의식을 심어주며 아이를 고통과 상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다. 너 때문에 내가 나쁜 엄마가 된 거다. 너 때문에 우리 가족이 이 꼴이 된 것이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그렇게 된 원인을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내가 나쁜 아이였구나. 나는 나쁜 아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구나. 앞으로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살아가야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아이들은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상처와 고통에 시달린다. 어른이 되어서도 상처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 나쁜 쪽은 상처를 준 어른들이고, 죄의식과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이들은 바로 그런 가해자들인데... 오히려 피해자인 아이들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마는 것이다.
가족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가 상처받은 아이들과 위기에 처한 가족을 구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역시 구원은 요원한 일이었다. 구원받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는 처절한 비극으로밖에 마무리될 수 없었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백미를 이루는 명장면, 명대사들로 넘쳐난다.
폭풍우 치던 밤 아이들이 아름드리 녹나무 아래에서 각자의 별명에 깃든 과거의 아픈 상처들을 차례대로 고백하는 장면이나 자신들도 충분히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상처 받은 유키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보호하는 쇼이치로와 료헤이의 모습들, 그리고 연쇄 살인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후반부에서 라스트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장면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순간순간 읽는 이의 감정을 들끓게 하고 가슴 속에 격한 풍랑을 일으킨다.
개인적으로는 훗날 형사가 된 지라프가 아동 성추행범을 현장에서 검거하는 장면이 대단히 인상 깊었다. 지라프는 범인을 잡은 즉시 현장에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녀석은 병원균입니다. 이 녀석도 누구에게 옮았겠지만, 어디선가 잘라내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라며 범인의 입안에 총구를 들이댄다. 나는 지라프가 방아쇠를 당겨 놈을 죽여주길 바라는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지 않아서 지라프에게 더 큰 시련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마 누구라도 그 부분을 읽으면 이런 분노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까 싶다.
상처 받은 이는 상처 주는 이를 극도로 미워하며 그를 다시 상처 입히는 방법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해결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마치 아이들이 서로를 한 대씩 때리며 끊임없이 싸움을 이어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는 싸움이 끝나지 않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와 상처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일은 비단 가족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죄의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한 마디 무심코 내뱉은 말이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행하기도 하지만 종종 의식하면서도 일부러, 혹은 어쩔 수 없이 행해야만 할 때도 있다. 누군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처를 입히면서 살아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표한하자면 누군가에게 병을 주든가, 스스로 병에 걸리든가... 여하튼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병원균을 퍼뜨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이며,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의 삶일 것이다. 그 관계를 끊기 위해서는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둘 이상이 모이면 서로에게 '상처'나 '병'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텐도 아라타가 이 소설을 쓴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문제일 것이다. 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왜 상처주고,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가족 사냥'을 읽고난 후에도 느낀 바지만 '영원의 아이'도 마찬가지의 느낌이 든다. 답은 없다는 것이다. 모범적인, 행복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어떤 행동들을 하고, 어떤 사고로 임해야만 하는 것인지... 어떤 실수는 하면 안되고, 어떤 사소한 행동이 그 실수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런 행동을 무심코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생각과 의식은 무엇인지... 너무 어렵다. 가족도 결국 타인이라면 타인과 관계맺고 살아가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고,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