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7
안치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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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겉멋을 더 덜어냈으면 한층 좋았을 것을... 글에서 신인작가 특유의 ‘나는 작가다!‘라는 경직과 강박이 자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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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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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려는 것일까...

 

 

수녀원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래생은 너구리 영감의 눈에 띄어 '개들의 도서관'에서 킬러로 키워진다.

고집스런 성격때문에 주위와 여러번 마찰을 겪던 래생은 마침내 자신의 성지와도 같은 도서관과 너구리 영감이 위험에 처하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위험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그와중에 목숨을 잃을 뻔도 하고 뜻하지 않은 조력자를 만나기도 하며 친구의 복수도 감행한다. 하지만 킬러로 길들여진 인간의 운명은 또다른 킬러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래생은 운명에 순응하듯(혹은 거부하듯) 스스로 죽음의 문턱으로 걸어간다.

 

딱히 '새로운' 킬러 이야기는 없다. 살인, 그 자체보다는 살인의 이면에 드리워진 '지령자'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즉 '어떻게' 살인이 이뤄졌나 보다 '누가' 그것을 시켰는지가 핵심이 된다. '왜'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 일을 시킨 이유보다 그 일을 시킨 자가 누구인지, '그'의 실체에 접근하는 일이 관건인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나'또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래생 또한 자신에게 살인을 지령하는 설계 너머의 그들에게 접근하려 목숨을 걸고 사지로 뛰어드는 것이다.


우선 스토리를 본다면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점이 아쉬웠다.

킬러가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기본 틀이 있을 것이다. '설계자들'은 아쉽게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남이 없다.

살인을 지령하는 자가 있고, 그것을 실행하는 킬러가 있다. 그러다가 킬러는 어느날 지령자를 배반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지령자의 미움을 받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지령자와 킬러와의 대결이 펼쳐진다.

이것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캐비닛'에서 보여준 싱싱한 상상력과 예측불허의 서사는 없었다. 김언수는 킬러라는 캐릭터로 떠올릴 수 있는 최대한 안전한 동선만을 그리고 그 위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그래서 페이지가 반절을 넘어서자 슬슬 책의 볼륨이 부담스러웠다. 뭐 이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이렇게 분량이 두꺼울 필요가 있나... 

과연, 확실히, 이 정도로 두껍게 나갈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설 후반 래생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행동'을 펼쳐 보이는 장면들도 뭔가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기시감이 휘감기는 그런 장면들로 나열되고 있었다. 소설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래생과 이발사(최고의 킬러)와의 대결도 그래서 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딱히 재미없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감탄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캐릭터로 가 본다면 더욱 진부한 느낌이 들었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다.

우선 주인공 래생. 그는 타인과의 타협이나 배려에 인색하고 고집이 세며 자신의 상식에 위배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보다 총구를 먼저 들이대는 성격이다. 당연히 친구가 있을 리 없다. 늘 외톨이며 스스로 고독을 즐긴다. 설계자들에 의해 계획된 작업도 자신의 방식대로 변형시키기 일쑤다. 그로인해 설계자들은 물론 주위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별 상관하지 않고 적을 향해서 거침없이 독설이나 욕설을 내뱉는다.

이런 시니컬한 성격의 킬러. 딱히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다. 킬러라는 직업만 뗀다면 이런 시니컬한 젊은 남자 주인공은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너무 많이 봐왔다.

그래서 래생의 그러한 행동과 말투가 멋있지 않았다. 매력이 없었다. 방 구석에 앉아 일주일동안 캔맥주만 마시는 모습도 내 눈에는 폐인 모드로만 보여 멋지다는 생각도, 혹여 따라하고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더구나 이것은 김언수의 전작인 '캐비닛'에서 이미 한 번 등장했던 장면이라 신선도가 전혀 없었다)

'첩혈쌍웅'의 주윤발같은 매력이나 카리스마는 찾을 수 없었다. 킬러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을 보자면 루이스 세풀베다의 '감상적 킬러의 고백'이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속의 킬러는 '첩혈쌍웅'의 주윤발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저 유명한 '바늘구멍'의 헨리 페이버는 어떤가. 얼마나 차가우면서도 얼마나 특색있고, 얼마나 매력적인가. 한번밖에 읽지 않았지만 헨리 페이버라는 킬러의 모습은 지금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킬러가 등장하는 또다른 소설, 이사카 고타로의 '오듀본의 기도'가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킬러 '사쿠라'는 무척 독보적인 색깔을 지닌 독특한 캐릭터이며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가 대단히 매력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등장하는 아오마메라는 여자 킬러도 있다. 이 여자는 딱히 매력적이진 않지만 적어도 '특색'은 있었다. 안타깝게도 래생에겐 이들과 대적할만한 '매력'도, '특색'도 없었다. 직업이 킬러라는 것말고는 딱히 내세울만한 '특별한 매력'이 없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작가는 래생을 '얼굴이 잘생긴', 혹은 '귀여운' 남자로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캐릭터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주윤발이나 감상적 킬러나 헨리 페이버나 사쿠라가 얼굴이 잘 생겨서 매력적이었던 게 아니다.

얼굴이 잘 생겨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래생은 젊은 시절 은신처를 찾기 위해 취직한 공장에서 만난 여공과 금방 친해지고 동거에 들어가고 사랑에 빠진다. 나중에 만나게 되는 미토라는 이름의 여성 설계자도 래생의 그런 외모에 반했는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미토의 동생 미사는 래생을 보며 '이 오빠 귀엽지?', '이 오빠 은근 근육질인데..' 따위의 낯간지러운 대사를 해댄다. 한 마디로 래생을 잘생긴 남자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쓸데없는 군더더기만 늘어났고, 쓸데없이 분량만 늘어난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굳이 킬러가 잘생길 필요는 없다. 킬러가 잘 생겨서 어쩌자는 건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킬러가 잘 생겨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킬러라는 직업을 가진 자는 그 특수한 직업으로 줄 수 있는 최대치의 긴장과 재미, 카타르시스만을 제공하면 된다. 굳이 잘생긴 외모를 앞세워 여자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해 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런 거라면 소녀취향의 로맨스소설에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가장 큰 불만은 여자 캐릭터들에 있다. 여자를... 왜 그렇게 못 그리는 걸까.

우리나라의 30대~40대 이상의 중년 남자 작가들은 소설 속에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 캐릭터를 그릴 때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그리는 지 모르겠다. 현실감도, 매력도 없는, 판에 박힌 인형같은 캐릭터만을 줄기차게 그려낸다.

첫 눈에 남자에게 반한 듯 과감히 말을 걸고 적극적으로 관심과 호감을 표하고, 그러다가 금방 사랑의 열병에 빠지고, 몸을 섞고... 마치 그 남자만을 위해 탄생된 캐릭터처럼 남자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완료된 여자. 

이건 완전 판타지가 아닌가...! 

남자 작가들 스스로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연애 판타지를 자신의 소설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니 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연애 놀음이 낯간지럽고 진부할 수밖에 없다. 그런 판타지, 작가 자신이나 즐겁지 남이 보기엔 유치하고 불편할 뿐이다. 

특히 남녀가 나누는 대화들은 왜 그리 유치한 지 모르겠다. 그런 것을 작가는 유머라고 생각하는 걸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누는 대사처럼 로맨틱하고 쿨한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왜 젊고 예쁘고 정상적인 사고를 갖춘 여자들이(설사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여자라 하더라도) 남자에게 그렇게 쉽게 끌리고 쉽게 몸과 마음을 열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작가 자신의 경험담인가, 자신의 판타지인가. 둘 중 뭐가 됐든 유치하거나 현실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남자 작가들에게서 좀 세련되고 멋진 여자 캐릭터를 기대하는 것은 정녕 무리일까. 제대로 근사하게 못 그릴 것 같으면 차라리 등장시키지 않는 게 좋다고 본다.

 

래생과 래생을 둘러싼 여자 캐릭터들을 제외하고서라도 딱히 매력적인 캐릭터는 없었다. 래생을 키운 '너구리 영감'이나 래생의 라이벌이자 적으로 등장하는 '한자'라는 인물도 어딘가 정형화된 모습인 것 같아 그들의 말이나 행동이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인물은 래생의 친구인 '추'와 최고의 킬러 '이발사'다. 하지만 이들도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는 아니다. 모두들 행동과 말투에서 기시감을 풀풀 몰고 다닌다. 신선도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하는 행동이나 성격이 주인공 래생보다는 더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절대적 기준'으로 본다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이나 우리나라 소설에 국한하여 '상대적 평가'를 해 본다면 가까스로 평균은 된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이런 정도의 소설이 해외에 판권이 팔리고 심지어 극찬을 받았다는 말은 믿기 힘들다. '극찬'을 받으려면 이보다는 훨씬 더 잘 써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김언수라면 이 보다는 훌륭한 작품을 써 줄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김언수의 작품 가운데 최고는 역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라는 중편이다. 이 작품은 신선했고, 구사하는 유머도 좋았고, 더구나 여자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아서인지 유치하거나 진부한 장면도 없었다. 주제도 소재도 주인공 캐릭터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나는 김언수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만큼의 수준을 기대하는 것이다. '캐비닛'은 그에 조금 못 미쳤고, '설계자들'은 많이 못 미쳤다. 나는 김언수가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와 결별하지 않기를 바란다. 즉 데뷔작이 가진 여러 장점과 매력들을 꾸준히 지켜 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그 감각을 잃지 말길...

김언수가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에서 점점 멀어져 '설계자들'에 가까운 소설만을 쓰게 된다면 내가 김언수와 결별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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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대상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공지영.손홍규.편혜영 외 19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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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발간된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 작가 자서전 부분만 떼어내 짜깁기한 것인가. 의미보다 상술만 엿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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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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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언젠가 유년 시절 살았던 옛 동네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이미 옛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낯선 동네로 변해 있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골목과 골목을 거닐다보니 아직 남아 있는 낡은 연립주택 돌층계에서, 길섶 화단가의 흙길들에서, 때로는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도, 희미하게 찍힌 어린 발자국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롭게 포장되어버린 풍경들의 틈새에 고여있는 옛 시간의 자취들을 목도한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이 돌층계를 오르내리며, 흙길을 내달리며, 지금은 아스팔트로 변해버린 골목 곳곳을 누비며, 아름드리 웃음과 이야기를 남겼을 그 시절의 신화는 이제 무성했던 잎과 열매를 잃고 처절한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한 줌 씨앗으로 돌아가 있었다. 유구한 시간과 사연을 품고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린 작은 씨앗들을 나는 반갑게 두 손으로 집어 올릴 수 있었다. 이 작은 씨앗을 옛기억의 텃밭에 심고 물과 거름으로 가꾼다면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그것은 의식의 밑바닥을 흐르는 이야기의 강과 맞닿을 것이다. 그 강은 시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물줄기들이 흐르고 흘러, 모이고 모여 이뤄진 것일 테다.

 

이기호는 이번 소설집에서 의식의 밑바닥을 흐르는 이야기의 물줄기를 찾아내 그것을 따라가는 작업을 한다. 문득 발견한 이야기의 기원을 쫓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야기가 탄생된 지점이 무척 낯설어서 놀라고, 그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반대로 이야기의 결말을 알기 위해 하구로 향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도 수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내가 쫓던 하나의 물줄기가 전혀 다른 시류에서 내려온 또다른 물줄기와 합쳐지고, 다시 그 물줄기가 새로운 물줄기에 합류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낯설고 흥미롭다. 그렇게 굽이를 돌며 합쳐진 물줄기는 마침내 거대한 바다의 어귀에 당도한다. 이쯤에서 이야기는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이야기가 결국 '인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야기의 하구에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어떤 인간의 얼굴로 바뀌는 지. 작가는 수록된 단편들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의 시원과, 그 하구에 퇴적되어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시원과 하구의 모습을 물줄기의 중간 지점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야기의 운명이란 결국 우연을 가장한 필연, 혹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에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연이란 결국 필연의 또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된다면 그 이야기의 탄생을 위해서 그 계기는 필연적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생에 난무하는 우연의 의미는 이야기 속에서 필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은 이런 의미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20세기 명차 가운데 하나인 '프라이드'를 몰고 사라진 삼촌의 행방을 쫓는다. 그것은 삼촌의 이야기를 쫓는 동시에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삼촌의 인생이 드러난다. 사라진 이야기를 쫓고,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 붙이고, 불현듯 합류되는 다른 이야기들을 목도하는 과정이 말하자면 한 인간의 '삶'이고, 삶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는 수많은 시류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들의 합류로 완성되듯, 수많은 우연과 필연의 교차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생에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설집 마지막에 수록된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은 하나의 이야기가 '우연'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고 폭주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그 이야기가 짊어지고 갈 '필연'적인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 형의 자취방으로 도망쳐 온 젊은 남자는 우연히 반바지 차림으로 문 밖에 서 있는 신세가 되는데, 문제는 그 남자가 입고 있는 반바지가 과연 반바지가 맞느냐, 아니면 팬티냐 하는 것이다. 남자는 굳건히 반바지라고 주장하지만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죄다 팬티라고 반박한다. 반바지가 팬티로 여론몰이되는 순간 이야기는 활개를 치며 새로운 방향으로 질주한다. 희/비극이 공존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인생의 물줄기가 시시각각 방향을 바꿔가며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다. 

 

이기호의 신작 소설집은 이야기로 가득 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진짜 이야기들의 향연도 있고, 이야기에 대한 고민도 있다. 이것은 어쩌면 작가의 '소설 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반영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이기호는 첫번째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부터 두번째 소설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거쳐 지금까지 늘 그런 작업을 해왔던 것 같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삶을 그린다. 이야기의 시류를 쫓는 작업이란 인간의 초상을 그리기 위한 스캐치에 다름없을 것이다. 이야기란 인간의 기억 속에 늘 씨앗으로 잠재되어 있으며, 언제든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인간의 삶을 이야기의 물줄기로 가득 채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탐구하기 위해 인간의 기억을 더듬고, 그 기억 속에 흩어진 이야기의 씨앗들을 발견하는 일은 그래서 흥미롭고 진지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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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탐정 김재건과 춤추는 꼭두각시 (보급판) - 2018 제1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
박하루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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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치를 많이 낮추고 읽었음에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 책을 읽기 직전에 하라 료의 작품을 읽었던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랄 수 있겠다. 

신인 작가의 작품에서 보이는 여러 단점과 실수들이 두루 눈에 띄었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안 웃기는 유머였다. 자기에게 대단한 유머 감각이 있다고 착각하는 신인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 작가도 그런 것 같았다.

안 웃겼다. 말은 많은데 재미는 없는 친구의 썰을, 정말 노력과 정성이 가상해서 괴롭게 듣고 있는 느낌이었다.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빤한 유머들로 독자에게 웃음을 강요하고 있는 듯했다.  

안 웃기니까 웃기려고 시도한 모든 부분들이 지루했고, 사족처럼 느껴졌다. 안 웃기는 유머가 소설 전반을 지배하고 있으니 다른 매력들도 잘 보이지 않았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안 웃기고 어수선하긴 책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부터가 그랬다.


유머를 싹 걷어낸다면 이야기를 직조하는 능력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개인적인 진단이지만 이 작가에게 타고난 유머 감각 같은 건 없어 보이니 차라리 웃음끼를 싹 빼고 건조한 문체로 소설을 써나가는 게 어떨까 싶다. 만일 유머를 고수하고 싶다면 지금보다 몇 백배는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글로써 남을 웃긴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리즈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깨에 힘을 더 빼고, 말도 더 줄이고, 더 긴 시간을 고심해서 다음 작품을 써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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