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 읽어본다
남궁인 지음 / 난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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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유명인인지는 모르겠는데, 스스로 유명인(혹은 잘난 인간)이라 자부하는 듯한 모습은 책 속에서 심심찮게 엿볼 수 있었다. 그런 자만심이 없었다면 정말 성실한 독서가의 블로그만도 못한 글귀들을 모아 책으로 낼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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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4호 - 2019.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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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부 팔아준 작가 버리지 못하는 창비의 장사꾼 민낯. 비평이라는 이름은 떼버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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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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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언제나 휠체어에 누워 잠들어 있는 소녀가 궁금했다. 

그녀가 언제 눈 뜰지, 언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마주하게 될지. 

어느 날 소녀는 사라지고, 긴 시간이 흐른 후 소년은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소녀와 재회하게 된다.

    

‘인어가 잠든 집’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을 통해 삶과 죽음의 정의, 그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 등을 두루 고찰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작 ‘공허한 십자가’에서 사형 제도를 깊이 고찰한 바 있다. 이번에는 뇌사를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뇌 기능 정지에 해당하는 뇌사 판정이 곧 사망 판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아직 심장이 뛰고, 인공호흡기를 통해 숨을 쉬고, 혈관을 따라 피가 돌고 있는 육신을 한순간에 무생물 취급 할 수 있는 걸까. 뇌사 판정을 받은 이가 바로 당신의 가족, 당신의 자식이라면...? 순순히 사망 판정에 동의하고 아직 심장이 뛰는 가족의, 자식의 육신을 담담히 관에 넣을 수 있을까.

반대로 아직 심장이 뛰고는 있지만 뇌가 기능을 멈췄고, 육신이 움직임을 멈춰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를 과연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를 아직도 가족이라고,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언제까지나 옆에 끼고 살아갈 수 있을까. 평생을 뇌사 상태로 식물인간처럼 병상에 누워 있는 이에게 ‘삶’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작가는 여기에 장기 이식 문제를 더해 더욱 난감한 질문들을 던지며 독자를 궁지로 몰아간다. 

뇌사로 인간으로서의 삶과 기능은 끝났지만 아직 장기는 살아있다. 그 장기를 늦기 전에 누군가에게 이식한다면 죽어가는 다른 생명을 온전히 살릴 수도 있다. 하나의 육신은 완전한 죽음을 맞지만 그의 몸에서 적출한 장기들로 죽어가던 다른 육신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포기하는 대신 그 사람으로 인해 다른 여러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다. 당신의 결정(뇌사를 받아들이고, 장기 이식에 동의) 여부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생명의 희비가 엇갈린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떤 선택이 바람직한 선택이며, 후회 없는 선택이 될까. 뇌사에 빠진 내 가족을 ‘죽음’으로 인정하고 그 장기를 적출해 죽어가는 다른 이들을 살려내는 게 바람직할까. 아니면 아직 심장이 뛰고, 체온이 남아 있는 내 가족을 끝까지 살아있다고 믿으며 붙들고 사는 게 바람직할까.

 

작중 가오루코는 뇌사에 이른 딸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함께 있으려고 한다. 움직임을 멈췄고, 의식도 멈췄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딸을 끝까지 살아 있다고 믿으며 심지어 언젠가는 의식도 돌아오고 눈을 뜰 것이라는 헛된 기대까지 품는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누군가의 장기 이식을 간절히 바라며 생명을 잃어가는 자식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다른 부모들의 모습도 그려진다.

하나의 생명이 완전히 꺼져가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고통스럽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은 그 고통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 생명이 자식의 생명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럼에도 자식의, 부모의, 가족의 ‘죽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순간을 피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죽음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찰은 대단히 중요하다. 

소설을 통해서라도 그 순간을 경험하고 고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유가치할 것이다. 소설 문학의 순기능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작품을 통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그러나 언젠가는 경험할 가능성이 있는) 삶을 미리 경험하고, 느껴보는 일.

죽음을 고찰하는 것은 결국 삶을 고찰하는 일이며, 인간을 고찰하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을 고찰하는 일이며, 우주를 고찰하는 일이다. 고찰은 성찰로 이어질 것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더 넓고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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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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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으면서 '젊음'을 느끼기가 참 힘들었다.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젊은이들의 말투를 쓰며, 심지어 (젊은)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듯한 부분까지 발견할 수 있음에도 '젊다'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젊은 작가들이 쓴 글이 왜 그렇게 기운 없고, 칙칙하고, 맥빠지는 느낌만 드는 걸까. 자기 연민에 빠져 우울해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명랑한 척 오버하거나... 이런 식으로 말고는 젊음을 그릴 수 없는 걸까. 그것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해도 소설 속에서까지 그런 칙칙한 젊음을 보고 싶지는 않을뿐더러, 대부분의 소설들은 현실의 반영이라기보다도 그저 개인(감성, 혹은 취향)의 반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당기려는 작가가 있고, 독자의 세계 속으로 다가가려는 작가가 있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한국의 젊은 작가들 작품을 읽으면서 후자를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다들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목청을 높이는 식이다. 심지어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작가들도 있는 것 같다. 독자들이야 관심이 있든 없든 나는 내 이야기만 하겠다는 작가. 그런 작가의 이야기는 어쩌다 귀 기울이고 들어봐도 딱히 흥미롭지도 않고, 공감도 안 간다. 작가 자신만 신나하며 자기 작품에 흠뻑 빠져 있는 것 같다. 자기 연민이나 우울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즐기는 작가와 작품들.

이번 '젊은작가상 수상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대략 이와 같았다.

그나마 김희선의 '공의 기원'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당기려 하지 않고, 독자의 세계 속으로 유연하게 다가가려 한 작품은 '공의 기원' 하나뿐인 것 같았다. 김희선이라는 이름 하나만 기억할 것이다(믿었던 정영수도 이번에는 실망스러웠다). '공의 기원' 하나만 본다면 별점을 네 개까지도 줄 수 있으나 나머지 작품들이 내 취향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별점을 더 높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과거의 수상작들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요즘의 취향이나 트렌드를 내가 못따라가기 때문일까. 이런 것이 정말 요즘의 취향이고 트렌드라면 나는 거기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다른 독자들은 너무 좋다느니, 아주 재미있다느니 잘도 칭찬들을 해대던데, 나에게는 와닿는 작품이 참으로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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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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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명하게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집. 나에게는 ‘공의 기원‘ 하나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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