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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평점 :
명망 높은 중년의 변호사가 살해된 채 차 안에서 발견된다. 수사를 맡은 형사 고다이는 피해자 주변 인물을 탐문하지만 사망한 변호사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는 성실하고 정의롭고 선한 변호사였다.
실낱같은 단서들에 기대 힘겹게 수사를 이어가던 중 고다이는 생전의 피해자와 통화했던 한 인물을 찾아 탐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사람 역시 피해자와 크게 연관 있는 인물이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을 이어주는 같은 장소가 존재한다. 그 장소가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파헤치던 중 고다이는 몇 가지 수상한 점을 발견하는데... 갑자기 그가 모든 것을 실토한다.
이제 그만, 됐습니다. 전부 내가 했습니다. 그 모든 사건의 범인은 나예요.
자백에 의한 피의자 검거.
자칫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며 수사는 일단락된 듯 보였으나 고다이는 뭔가 석연치 않다.
우리는 정말 미궁에 빠지려는 사건을 해결한 것인가. 어쩌면 새로운 미궁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한편 범인이 드러났지만 피해자의 딸은 납득할 수가 없다. 사건 전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납득할 수 없기는 피의자의 아들도 마찬가지. 역시나 아버지가 '죽인 이유'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만나 함께 '진짜 이유'를 찾아나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 데뷔 35주년 기념 작품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무려 18000원이라는 높은(그리고 불만스러운) 가격으로 출간한 '백조와 박쥐'는 특별한 기념작답게 재미있게 잘 읽힌다.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그동안 숱한 작품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여줬던 여러 서사와 이미지, 트릭들을 총망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게 표현하면 진수성찬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잘 끓인 잡탕찌개가 될 수도 있겠다.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특징이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했다.
단점이라면 클리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서사와 트릭, 캐릭터, 사연들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서사의 진행이나 미스터리 구조가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짐작 가능한 수준으로 서사가 흐르거나 독자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는 작가의 미끼와 덫이 종종 눈에 보인다. 가령 '모든 사건의 범인은 나예요'라고 외치며 스스로 유치장으로 들어가는 용의자가 사실은 진범과는 거리가 멀거나 말 못할 사연 때문에 진범인 척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을 히가시노 게이고 마니아(혹은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예측 가능하다. 심지어 그 사연이나 숨겨진 뒷 배경, 베일에 가려진 진실조차도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하거나 적어도 드러난 그 모양새가 그리 새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만큼 이 작품 속에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이 진하게 녹아 있으며, 그간 작가가 써왔던 작품들의 특색이나 흔적 또한 숱하게 배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용의자 X의 헌신'이다. 다시 쓰는 용의자 X의 헌신이라 해도 좋을 만큼 두 작품은 닮은 구석이 많다('용의자 X 2의 헌신'이라 할 만 하다). 그 외에도 '붉은 손가락', '기도의 막이 내릴 때', '기린의 날개' 등 작가의 대표작에서 경험했던 서사나 분위기, 트릭이나 사연의 냄새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럼에도 이런 익숙함이 마냥 단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당 부분 장점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를 특정 지었던 숱한 요소들은 다소 익숙하더라도 여전히 강력한 흡인력을 발산한다. 같은 맛을 내지만 먹을 때마다 늘 맛있는 라면처럼.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에 익숙하든 말든 독자들은 이 스타일에 여전히 매료될 수밖에 없다. 익숙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손길로 반죽되어 구워진 미스터리의 빵은 여전히 풍미가 넘치고 맛깔난다. 이것이 눈속임을 위한 미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 좋게 물 수 있다. 미끼를 물고 작가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도 여전히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 휘둘림이 크게 신선하거나 충격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기막힌 반전이나 충격적인 진실 같은 것은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소소(so so)한 반전과 결말이었다(피의자의 자식과 피해자의 자식이 함께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가는 설정은 꽤 흥미진진했다).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단호하게 범죄자가 되려는 사람의 내면에는 어떤 뜨거운 감정이 들끓고 있을까. 사회적으로 성공한 명사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 존경받는 정의롭고 선한 사람의 과거에는 또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그들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죄의 씨앗은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서 발아하는 것일까. 내 안에 한순간 드리워진 죄의 그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어둡고 차갑게 만드는 것일까. 얼마나 외롭고 무섭게 만드는 것일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그늘은 사라지지 않고 먼 곳까지 뻗어나가는 것일까.
다소 낡은 주제일 수 있으나 죄와 인간. 그리고 정의에 대해 다시금 고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죄는 지어서 남 안 준다'라는 김운경 드라마 속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자기가 지은 죄는 반드시 부메랑처럼 자기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언제가 되든, 어떤 형태로 오든 반드시, 돌아온다. 죄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