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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호의 악몽 1 ㅣ 버티고 시리즈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빙하보다, 괴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북극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항한 최신식 증기 범선 이리버스 호와 테러 호가 캐나다 북단의 빙하 지대에 갇혀 고립된다. 이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현실은 악몽에 잠식당한다. 본국과의 연락은 두절됐고, 향후 일정을 두고 선내에서는 갈등이 빚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선원들의 주식이 되어줄 통조림이 군납 비리에 의한 납땜 불량으로 절반 이상이 부패했으며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괴물까지 등장해 선원들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괴물의 존재는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덩치도 크고 가공할 힘을 지녔으며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 당할 재간이 없다. 외형은 거대한 북극곰을 닮은 듯하지만 북극곰이 그렇게 클 수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이 나타났거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의 세계로 인간들이 진입한 것이다.
고립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악몽은 더욱 짙어진다. 선원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고, 부패한 음식으로 인해 괴혈병으로 죽고, 느닷없이 출현한 빙하 괴물에게 무시로 잡아먹히기까지 한다. 함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하나둘씩 죽자 선원들의 기강도 느슨해지고, 상관에 대한 반발과 불복종의 조짐까지 보인다. 마침내 배를 버리고 빙하를 이동해 살 곳을 찾아 나서지만... 추위와 질병, 괴물의 습격,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발동한 인간의 흉포한 본능과 야만성이 남은 사람들의 목숨을 시시각각 위협한다.
댄 시먼스의 역작 '테러호의 악몽'은 실화를 극화한 작품으로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한 본능을 날카롭게 묘파해 북극의 얼음장 같은 추위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괴물의 공격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존재는 결국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역설한다.
1권 중반까지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데 함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차례로 죽어나간 후 몇몇 선원들의 마음에 광기가 발동하는 순간부터 강렬한 흡인력을 자랑하며 2권 마지막까지 쉴 틈 없이 읽힌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의 북극 판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이 얼마만큼 바닥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악몽과도 같은 고립과 재난 상황에서 진짜 공포는 인간들의 손에서 빚어진다. 동료에게 느닷없이 칼날을 날리고, 편을 갈라 상대를 끔찍하게 도륙하고, 급기야 인육까지 섭취하는 인간의 소름 끼치는 만행은 거대 괴물의 공격을 귀여운 수준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다.
댄 시먼스는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공포에 대한 이해와 묘사가 무척 탁월하다.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재난 소설로도 읽히지만 공포소설로 봐도 역대 공포소설 베스트에 오를 만큼 성취도가 높다.
처음에는 빙하 괴물의 등장에 당혹스럽고 적대적인 감정도 들었지만 나중에는 괴물이 선원을 공격하는 장면에서는 공포보다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괴물의 출현 빈도가 낮아지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도 남기 때문일 것이다.
작중 또 하나 인상적인 인물은 신비한 아우라를 품은 인디언 처녀였다. 인디언 처녀가 등장할 때마다 뭔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끔찍한 악몽 같은 재난과 공포 속에서 인디언 처녀는 기이한 위안과 위로, 휴식을 제공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