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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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장 희극적으로 재난을 극복한 남자. 아주 조금이라도 빛이 존재한다면 희망을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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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아이 - 상 영원의 아이
덴도 아라타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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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구원은 없다.

 

 

 텐도 아라타는 야마모토슈고로상 수상작인 '가족 사냥'을 통해 이미 가족에 대한 섬뜩한 고찰을 보인 적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혹독한 상처를 입히고 있는가. 가족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나 '가족 사냥'은 결국 전망부재의 파국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텐도 아라타가 보여준 가족의 초상은 참혹했으며, 문제의 답은 없었다. '구원'은 없었던 것이다.

'영원의 아이'는 '가족 사냥' 이후 3년 여만에 발표한 작품으로 다분히 '가족 사냥'의 연장선 상에 위치해 있다. 이 작품은 '가족 사냥'의 후속작처럼 보이기도 하며, 동시에 '가족 사냥'의 전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족 사냥'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은 부모를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거나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영원의 아이'는  그 반대의 이야기, 즉 부모로부터 엄청난 학대를 받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가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

보살핌이 필요한 나약한 어린 아이에게 가장 안전하고 믿음직스런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 인간이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구속과 제약의 틀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태어나서 처음 만나게 되는 '타인'들인 것이다.

가족이 안전과 믿음의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고 구속과 제약, 타인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순간 암담한 공포가 발화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아직 스스로를 제어할 힘도 사고도 부족한 어린 아이의 내부에서 발화할 경우 아이의 미래는 순식간에 검은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아무리 순수하고 애정어린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이 아이에게 예상치 못한 상처가 될 수 있고, 불유쾌한 기억으로 각인될 수 있다. 나는 순수하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가가지만 아이는 그것을 구속과 제약,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에게 억지로 밥을 많이 먹게 하는 행위, 집 안에서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억지로 집밖으로 내 몰아 여러 사람들 사이에 집어넣는 행위,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이끌고 교회에 가는 행위 등... 부모들은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아이의 행복과 가족의 화합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어른이 되어서까지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아이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광적인 집념이나 열정에 치우치다보면 어느 순간 시야가 좁아지고 편협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때문에 스스로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아이의 입장따윈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자신의 행위에 일체의 의심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행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대로 아이에게,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갈등을 조성하고 생채기를 입히게 됨을 알리 없는 것이다. 내 뜻대로 만들어가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노력하는 이 가족이, 아이들이 튼튼하고 행복하게, 제대로 성장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나중에야 그 실체를 제대로 보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후다. 더이상 손 쓸 방도가 없는 지경까지 와 버린 후에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어서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부모들이 있다. 나는 한다고 해 왔는데 왜 우리 가족의 모습이, 내 아이들의 모습이 이 모양이 되고 말았나... 이건 필시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건 분명 아이의 잘못이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내 말대로 제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너희들의 잘못이다. 너희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착각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가뜩이나 상처받은 아이들을 죄인으로 내몰기까지 한다. 이러니 결국 파국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가족 사냥'에서는 이런 파국을 맞은 가족의 모습을 흰개미에 점령당한 집에 비유해서 묘사한다. 애초에 흰 개미 몇 마리가 집으로 침투하면 집은 몰락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흰개미는 언제나 무너질 집에만 침투하는 것이고, 흰개미가 침투했다는 것은 곧 그 집이 무너질 것이라는 표식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처음 몇 마리가 들어왔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대대적인 구제작업을 벌인다면 집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흰개미가 벽 곳곳에 알을 까고 부화해서 수천, 수만마리로 늘어난 상태라면 구제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이제 해결 방법은 그 집 자체를 파괴시켜 버리는 것밖에 없다. 흰개미가 다른 집으로까지 옮겨가기 전에 말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차라리 완전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 갈등과 상처라면 해결 방법이 더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가족이라는 구속과 제약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옴짝달싹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모두의 파멸이라는 극단의 방법만이 문제 해결의 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원하든 원치않든...

 

'영원의 아이'는 5년이 넘는 준비와 집필 기간에 원고지 5천 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완성된 텐도 아라타 최고의 역작이다. 혹자는 이 작품을 두고 '이 책은 과소평가해서 올해 일본문학 베스트 1위, 그러나 진심을 말하자면 지난 10년 동안의 베스트 1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영원의 아이'는 재미와 작품성을 동시에 갖춘 중량감 넘치는 걸작으로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문학으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 지금까지 누적 판매부수 210만 부를 넘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며 일본에서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역대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가운데서도 가히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힐만 한데, 물론 이 작품은 본격 추리소설과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미스터리와 마지막 순간에 밝혀지는 반전과 진실은 독자를 흥분과 감동으로 이끌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흡인력 또한 대단하다. 국내 편집본으로 1500 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이야기는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이야기 속으로 완벽하게 빠져들고 만다. 이야기라기보다 세 명의 아이들 - 루핀과 모울, 지라프라는 인물들에 빠져들고 만다. 누구라도 루핀과 모울, 지라프의 가슴 아픈 삶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루핀, 모울, 지라프라 불리는 세 아이들 - 유키, 쇼이치로, 료헤이. 이들은 각자 부모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학대와 상처를 받고 소아과 정신 병동에서 만난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보이며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나눈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면서 살아갈 힘과 구원의 희망을 얻는다.

그리고 17년이 흐른다. 17년만에 각자 간호사, 변호사, 형사가 되어 재회하는 아이들. 이제는 아이라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어린 시절의 상처와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은 유효하지만 아직 가족은 병들어 있는 상태다. 각자의 가족들에 의해 파생되는 끊임없는 갈등과 문제들은 여전히 진행형이었으며, 거기다가 묻어 두고 싶었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되살아나며 세 사람을 수시로 괴롭힌다. 설상가상으로 범인을 알 수 없는 끔찍한 연쇄 살인과 무시무시한 방화가 터지면서 세 사람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사건은 원만히 해결되고, 그 아이들은 가족과 화해하고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될까... 

 

'영원의 아이'의 첫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루핀과 모울과 지라프가 열두 살 아이였던 시절, 병원 퇴원을 앞두고 그들은 신의 산 꼭대기에 올라 빛나는 사람과 조우한다. 상처뿐인 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그 빛나는 형상을 바라보며 아이들은 다짐한다. 그들은 이제 곧 사람을 죽일 예정인 것이다. 이 오프닝은 묘한 기시감과 향수를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안타까운 운명을 예감케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차치하고 어린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고 무서운 것이다. 오죽 했으면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가족은 뭘 하고 있었던가. 아이들이 그런 끔찍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은 왜 아이들을 내버려 뒀나... 가족의 역할이, 가족의 힘이 어째서 아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가족은 대체...

가족은 아이들에게 상처와 공포만을 안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는 학대와 고통...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무서운 죄의식. 부모들은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그 원인을 아이 때문이라고 한다. 끔찍한 죄의식을 심어주며 아이를 고통과 상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다. 너 때문에 내가 나쁜 엄마가 된 거다. 너 때문에 우리 가족이 이 꼴이 된 것이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그렇게 된 원인을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내가 나쁜 아이였구나. 나는 나쁜 아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구나. 앞으로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살아가야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아이들은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상처와 고통에 시달린다. 어른이 되어서도 상처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 나쁜 쪽은 상처를 준 어른들이고, 죄의식과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이들은 바로 그런 가해자들인데... 오히려 피해자인 아이들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마는 것이다.

가족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가 상처받은 아이들과 위기에 처한 가족을 구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역시 구원은 요원한 일이었다. 구원받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는 처절한 비극으로밖에 마무리될 수 없었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백미를 이루는 명장면, 명대사들로 넘쳐난다.

폭풍우 치던 밤 아이들이 아름드리 녹나무 아래에서 각자의 별명에 깃든 과거의 아픈 상처들을 차례대로 고백하는 장면이나 자신들도 충분히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상처 받은 유키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보호하는 쇼이치로와 료헤이의 모습들,  그리고 연쇄 살인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후반부에서 라스트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장면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순간순간 읽는 이의 감정을 들끓게 하고 가슴 속에 격한 풍랑을 일으킨다.

개인적으로는 훗날 형사가 된 지라프가 아동 성추행범을 현장에서 검거하는 장면이 대단히 인상 깊었다. 지라프는 범인을 잡은 즉시 현장에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녀석은 병원균입니다. 이 녀석도 누구에게 옮았겠지만, 어디선가 잘라내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라며 범인의 입안에 총구를 들이댄다. 나는 지라프가 방아쇠를 당겨 놈을 죽여주길 바라는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지 않아서 지라프에게 더 큰 시련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마 누구라도 그 부분을 읽으면 이런 분노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까 싶다.

상처 받은 이는 상처 주는 이를 극도로 미워하며 그를 다시 상처 입히는 방법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해결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마치 아이들이 서로를 한 대씩 때리며 끊임없이 싸움을 이어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는 싸움이 끝나지 않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와 상처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일은 비단 가족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죄의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한 마디 무심코 내뱉은 말이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행하기도 하지만 종종 의식하면서도 일부러, 혹은 어쩔 수 없이 행해야만 할 때도 있다. 누군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처를 입히면서 살아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표한하자면 누군가에게 병을 주든가, 스스로 병에 걸리든가... 여하튼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병원균을 퍼뜨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이며,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의 삶일 것이다. 그 관계를 끊기 위해서는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둘 이상이 모이면 서로에게 '상처'나 '병'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텐도 아라타가 이 소설을 쓴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문제일 것이다. 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왜 상처주고,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가족 사냥'을 읽고난 후에도 느낀 바지만 '영원의 아이'도 마찬가지의 느낌이 든다. 답은 없다는 것이다. 모범적인, 행복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어떤 행동들을 하고, 어떤 사고로 임해야만 하는 것인지... 어떤 실수는 하면 안되고, 어떤 사소한 행동이 그 실수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런 행동을 무심코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생각과 의식은 무엇인지... 너무 어렵다. 가족도 결국 타인이라면 타인과 관계맺고 살아가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고,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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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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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없는 세상을 향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된다.

 

 

- 태양빛은 세상 모든 곳에 골고루 비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곳은 일년 내내 습지고 그늘이다. 어떤 곳이라기보다 일부를 제외한 세상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면 세상이라는 거대한 신문 속을 누비게 된다. 한쪽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한쪽에선 폭력의 핏방울이 튀고, 한쪽에선 교통사고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다.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위태롭게 눈앞을 휙휙 지나가고, 수많은 일그러진 삶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놀라운 사건들이 일상의 풍경인듯 무심하게 세상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 모든 일들이 '남의 일'에 불과하다면 신문 귀퉁이에 실린 삽화만큼이나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 될 것이다. '나의 일'이 되는 순간 비로소 썩은 악취가 맡아지고, 일그러진 풍경들에 대한 분노가 발생한다. 세상과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뉴스들이란 세상의 풍경 가운데 카메라로 담아 내고, 기자들의 발품이 닿는 곳까지의 작디 작은 조각 모음에 불과하다. 진짜 세상의 이야기는 매스컴의 보도 너머에 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진짜 이야기를 보려면 수면 아래로 들어가야만 한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 아닌 그늘 속 밑바닥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세상의 그늘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무수한 벌레들이 들끓고 있다.

눈앞에서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는 인간들의 발자국들로 더렵혀진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한다. 신문를 덮어서 멀리 던져버리듯, 세상의 풍경과 담을 쌓고 멀리 동떨어져 살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 하늘로까지 치솟아 오르는 거대한 21세기는  아래로 긴 그늘을 만들어 낸다. 그곳은 태양빛이 닿지 않는, 썩은 내가 진동하는 벌레들의 세상이다. 바로 우리들의 세상인 것이다. 우리라는 '우리'에 갇혀 버린 대다수의 인간들이 '인생'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무대다. 잡초가 무성하고 벌레들이 들끓는 음습한 세상의 밑바닥.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고, 그곳에 들러붙어 치사하고, 야비하고, 비겁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진짜 이야기는 그곳에 있다. 높디 높은 저 허공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곤도 아야코 선생은 경찰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학교를 모른다고. 아이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모른다고.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이야기만으로는 그들을 알 수 없다. 한 반짝 떨어져서 관망하는 태도로는 진실을 알 수 없는 법이다. 학생들의 실상을 알고 싶으면, 학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으면 그 안으로, 깊숙한 그늘, 어둠의 심연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줄 알아야 한다. 벌레처럼, 잡초처럼 어둠 속에서 기거하는 대다수 인간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선 그들의 숨소리가 들릴 수 있는만큼의 거리까지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21세의 학생들. 10대라는 나이, 깔끔한 교복과 앳된 외모에 속아서는 안 된다. 굴지의 대기업 총수나 전국구 조직 폭력배 보스가 저지르는 비리와 횡포, 폭력에 맞먹는 강력한 '흉포함'이 그들 속에 도사리고 있다. 21세기의 그늘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몬스터. 괴물은 비단 학생들만이 아니다.

나는 지하철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 장소에서 추태를 부리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과연 어떤 유년기를 보내면서 뇌구조가 어떤 꼴이 되어야만 저런 인간이, 저런 어른이 되는 것일까.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안 생긴다. 그저 분노만 느낄 뿐이다. 분노한다. 물론 그것을 내부에서 밖으로 표출하기까지는 다시 막대한 용기와 책임을 필요로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어떤 수단을 써도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말하자면 이미 태양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아버린 족속들이라 이제와서 태양 빛에 노출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환한 태양 아래서 몬스터가 온전히 존재할 수 없듯.

상황이 이러니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세상이라는 신문을 펼쳐 들고 분노하거나, 접고 외면하거나...

분노의 표출로까지 이어지는 선택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말했다시피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잡초 몇 개가 뽑혔다고 잡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금방 빈자리를 채우며 더욱 무성하게 피어날 것이다.

10대 폭주족들에게 딸을 잃은 아야코는 분노를 표출하기에 이른다. 아니 그것은 분노라기 보다는 차라리 새끼를 잃은 어미의 본능적인 광기다. '남의 일'이 아닌 '자기 일'이 되는 순간 어미는 미쳐버리는 것이다. 만일 딸이 죽지 않았다면 그러한 광기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의 아야코는 썩은 세상의 신문을 들추지 않고 '외면'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해가 오지만 않았다면, 하나 밖에 없는 딸에게까지 몬스터의 더러운 마수가 뻗어오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외면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딸을 잃은 아야코는 광기에 휩싸인채 폭주한다. 무언가 바뀌길 기대하며 저지른 일이 아니다. 그녀도 알고 있다.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다만 분노이며, 광기이며, 세상을 향한 '폭력'일 뿐이라는 것을. 세상으로부터 받기만 했던 '폭력'을 다만 조금 되갚아 줄 뿐인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비극'을 담보해야만 하는 일이다. 스스로 폭탄이 되어 세상의 일부분을 파괴시키는 행동이다. 아야코의 폭주가, 광기가 그래서 외롭고 쓸쓸해 보였던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아야코의 행동에 눈곱만큼도 비난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바다. '방황하는 칼날'에서 딸을 성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10대 소년들을 하나씩 찾아가 처형시키는 아버지를 보면서도, '가족사냥'에서 질서와 윤리가 무너진 타락한 일가족을 차례차례 박멸시켜나가던 해충구제요원을 보면서도 나는 그 끔찍한 살인들에 화가 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광기에 휩싸이게 만든 원인제공자들에게 화가 나고 분노할 뿐이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그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다. 분노할 수 있고, 외면할 수도 있고, 숙청을 감행할 수도 있지만 구원할 순 없는 것이다. 구원은 없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 거리의 곳곳에서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고, 21세기의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진절머리나는 저 거리, 저 세상은 신마저도 일찌감치 외면해 버린 저주의 땅이다. 태양빛이 닿지 않는 썩은 땅 위엔 희망도, 구원도, 해결책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접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기분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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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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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

조직의 정치학

 

 

쇼와 64년. 쇼와 시대를 7일 남겨두고 D현경 관할 지구에서 소녀가 유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모든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유괴범을 검거하고자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유괴범은 돈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지고, 며칠 후 소녀는 차디찬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천왕의 붕어와 함께 쇼와 시대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관계자들의 가슴 속에서 쇼와 64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녀 유괴 살해사건은 D현경에서 풀지 못한 단 하나의 미제 사건이었고, 때문에 '64' 사건은 담당자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는다.

사건 후 14년이 흐르고 당시 64 사건의 수사 담당자였던 미카미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는 D현경 경무부 홍보과에서 근무하는 신세가 된다. 경무부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미카미는 형사부로의 복귀를 갈망하지만 현실은 마음 같지가 않다. 당장 무릎까지 산적해 있는 문제들부터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홍보과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은 물밀듯 밀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현장에서 흉악범을 검거하는 쪽이 차라리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기에 경찰청장 방문이라는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한다. 기자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은 상황에서 경찰청장 방문까지 감당해야 하는 미카미에게 형사부로의 복직은 요원한 일만 같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카미는 가장 큰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 여고생 딸이 외모를 비관하여 가출한 후 행방불명된 것이다. 미카미는 과중된 경찰 업무와 조직의 부조리에 시달리는 한편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도 혈안이다. 이런 와중에 쓰라린 상흔으로 남은 64 사건을 다시금 헤집고 다녀야 하는 처참한 상황까지 닥친다. 공소시효를 1년 남겨둔 지금 시점에서 다시금 64의 악몽이 되살아나 미카미를 비롯 많은 D현경의 경찰들을 괴롭힌다. 

 

이 소설의 장점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전작들에서 보여진 장점들과 거의 일치한다.

그것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현장감'이 되겠다.

숨막히는 현장감.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숨막히는 '현장' 한 가운데 서 있게 된다. 그곳은 경찰들의 세상이다. 좋은 소설은 특정 분야를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그 안에서 보편적인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일련의 경찰 소설들이 그렇다. 그것이 작품의 장점이며 작가만의 강점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64'에서도 작가는 6밀리 카메라로 밀착 다큐를 찍듯 D현경의 수많은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삶의 그늘까지 생생히 묻어나는 그들의 일과를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홍보과에서 근무하는 미카미를 둘러싸고 경찰 내부에서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문제는 마찰을 야기하고, 마찰은 분노를, 분노는 혼란을 야기한다. 소설 초반부터 꾸준히 미카미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기자들과의 문제가 하나의 큰 축을 차지한다. 사건의 취재를 위해 밀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까다롭고 애매모호하며, 중대하고도 우스꽝스런 일인지 중년의 미카미는 새삼 깨닫는다. 그들을 상대하는 일은 어린 애들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성가시고 예측불허다. 하지만 그들의 호의적인 도움 없이는 홍보과는 물론이고 경찰 조직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 기자와 경찰은 숙명적인 공생관계인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동료 경찰들과의 관계다. 상/하급자, 선/후배, 남/녀 경찰 등의 갈등이나 대립, 알력 다툼 등이 쉼없이 발생한다. 미카미는 형사부 수사과에서 근무하고 싶지만 현재는 홍보과로 내쳐진 상황이다. 형사부로 다시 복직하기 위해서는 인사 담당자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업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즉 경무부에 충성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경무부에 충성을 할수록 형사부와의 관계는 점점 더 벌어진다. 문제는 경무부와 형사부가 알게 모르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고(힘겨루기는 이들만이 아니라, 경찰과 기자, 상급자와 하급자, 부서와 부서, 동료와 동료 등 여러 곳에서 발생한다), 미카미는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흉악한 살인사건이나 테러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D현경 경찰 본부는 내부의 전쟁으로 시시각각이 살벌하고 위태롭다.

 

문제는 미카미만 떠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질식 직전의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기는 D현경에서 근무하는 거의 모든 경찰관들이 마찬가지였다. 미카미의 입장에서는 미카미가 가장 큰 고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찰들이 나름의 문제들로 고민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조직' 사회가 떠안고 있는 문제다. 조직사회 특유의 부조리와 비합리, 모순들...

이 소설은 조직사회가 필연적으로 안고 가야할 문제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생하는 필요악에 대한 보고서다. 조직사회에서 '조직'은 과연 '조직원'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한 고찰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에 귀속되어 있다. 조직 안에서 웃고, 울며, 열정과 의지를 발휘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조직'에 완전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조직 안에서 나름의 질서와 행복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조직의 모순을 비판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조직의 수뇌부에 올라서고 보면 그 모든 조직의 불합리와 부조리한 '문제'들이 타당하고, '필요'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것이 없으면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것만 같다. 조직원들의 불평, 불만, 고민, 갈등은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조직의 불합리와 모순들이 사리질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조직원들을, 그리고 조직을 그나마 온전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필요악'이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흥행에 성공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도 어쩌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조직을 극복하려 힘쓰지만, 누군가는 조직을 유지하려 힘쓴다. 누군가에게 조직은 끔찍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조직은 사명이다. 이들 모두가 어쨌거나 조직 안에서 존재하고 있기에 조직은 굴러가는 것인지 모른다. 소설 속에서 미카미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는 어떤 인물의 태도가 작의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경찰 조직을 해부하며 그 정치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보편적인 조직의 정치성이며, 세상의 정치성인 것이다. 개개의 구성원들이 모여 조직을 만들고, 조직은 정치를 야기하고, 정치는 구성원들에게 필요악이 되는 것이다. 정치가 싫어도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며,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64'는 추리소설로 분류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찰소설'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제3의 시효'를 통해 경찰소설의 진수를 보여준 바 있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번 경찰소설만이 갖는 매력과 가치를 확실히 전달한다. 난무하는 추리/미스터리 소설들 속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 수작이다. 말하자면 '탄생의 이유'가 명확하기에 확실한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작품이다. 

미카미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경찰 내부는 끊임없는 문제와 갈등으로 흔들리지만 그들은 부딪히고 비틀거리는 과정 속에서 각성하고, 묘한 질서와 체계를 잡아간다. 조직은 그렇게 면모를 유지해가고, 때가 되면(위기가 오면) 서로 뭉쳐 특유의 힘을 발휘한다. 64 사건의 공소 시효가 1년을 남긴 시점에서 다시금 14년 전과 유사한 소녀 유괴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은 14년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돈을 요구한다. 조직 내부의 문제들로 반목과 갈등을 되풀이하던 경찰들은 그러나 64 사건의 재현 앞에서는 조직력을 발휘한다. 질투와 시기와 모순과 불만 따위는 잊고 오직 소녀를 구하기 위해,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아직도 막을 내리지 않은 채 미완으로 남아 있는 쇼와 64년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순수하게 분노하며, 분투한다. 이 대목에서 서사는 장르적 힘을 발휘하며 예상치도 못한 반전을 터뜨린다. 슬픔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감동적인 반전도 무척 좋았으나 나는 반전보다 역시 '현장감'에 더욱 도취되었다. 요코야마 히데오가 그려내는 '현장감'의 매력은 정말 이 소설만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10년이 걸렸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정도의 노고과 열정이 생생한 '현장감'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그야말로 필생의 역작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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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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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했던 김연수는 '나는 유령 작가입니다'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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