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의 작품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는 게 한편으로 후회스럽고, 이제라도 읽게 되었다는 게 한편으로 다행스럽다. 이런 문학을 국내에 소개해준 출판사에 감사드리고 싶다. 편집장의 안목에 찬사를 보낸다. 물론 작가에 대한 찬사가 앞서겠지만.왜 일본 문학을 하루키와 바나나가 양분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 것 같았다.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멋진 말들을 하루키가 딱 반을 사용했고, 나머지 반을 바나나가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하루키의 책에 몰입하면서 매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던 2000년, 2001년의 내 모습이 바나나의 소설을 읽으며 재현되고 있었다. 이제 바나나의 소설들을 모두 사 읽을 것 같다. 키친은 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작인 키친과 만월은 이어지는 연작이며, 마지막 수록작인 달빛 그림자는 바나나가 니혼 대학 문학과를 졸업하면서 쓴 단편으로, 예술학부장상을 받으며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첫 작품이다. 이 소설들은 일단 무지 잘 읽힌다. 하루키의 소설처럼 기막힌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의 디테일과 스쳐지나가는 작은 존재들에서 우주와도 같은 큰 의미를 포착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루키의 소설과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하루키는 이야기의 힘이 강한 반면 바나나는 분위기의 힘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그녀는 그녀만의 분위기로 이야기를 포장할 줄 안다.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루키와 전혀 다르다. 같은 청춘의 상실과 회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지만 하루키의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색깔을 보인다. 하루키보다 늦게 데뷔했으면서 자신만의 색깔로 하루키 못지 않은 입지를 다져 나간 것이다. 놀랍다. 과연 작가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진 진정한 작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