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소설이라는 장르로 매우 즐겨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이 갑자기 일상의 작은 균열로 인해 이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루키의 중편소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신작 장편 '가호'도 그렇다. 그림책 작가인 스물여섯 살 여자 가호는 언제부턴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원래의 세상이라면 개미핥기가 눈앞에 나타나 사람처럼 말을 걸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루키 소설의 시그니처가 되어버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 속에서 가호는 원래의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를 찾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문득 드는 생각은 어쩌면 소설 첫 장면부터 가호는 이미 이계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고, 그 이계란 다름 아닌 하루키라는 작가가 써 내려가는 소설 속 공간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가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인물이지만,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거대한 창작자의 캔버스 위에 불쑥 던져진 것이다. 어리둥절한 채 작가가 파놓은 작위적인 설정과 가혹한 플롯에 끌려다니면서 매 순간 위화감과 부조리를 느낀다. 개미핥기가 시키는 대로 먼 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들의 심부름을 하는 등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모습은 작가의 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이리저리 휩쓸리는 인간의 모습과 같다.
소설 속 가호는 점점 각성한다. 그 자신도 그림책을 쓰는 창작자인 것이다. 자신이 쓰는 그림책 속 주인공이 잃어버린 길을 찾아 나서고 운명을 극복해가는 것처럼 가호도 피조물의 위치에 마냥 순응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이 세계의 중심은 너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 가호를 향한 말이고 가호가 창작하는 그림책 속 주인공에게 하는 말이고, '가호'라는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하루키가 던지는 말일 것이다. 가호는 작가가 짜놓은 판에 박힌 캐릭터에서 자신의 서사를 직접 이끄는 주도적 주인공으로 변해간다. 결국 소설이라는 이계 속 숙적인 흰개미 여왕과의 최종 승부에 돌입하며 잘못 들어선 세계의 출구를 향해 나아간다.
가호는 삼촌과의 대화에서 발터 벤야민이 말한 '좋은 이야기에는 반드시 유용성이 포함되어 있다'라는 말을 되새긴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가호라는 인물을 통째로 소설이라는 이계에 던져 넣음으로써 우리에게 증명해 보인 이야기의 쓸모는 무엇일까.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이나 악의가 기습처럼 찾아오곤 한다. 하루키는 가호의 모험을 통해 문을 닫고 도망치는 대신 그 부조리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일상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는 용기를 전한다. 삶의 통제 불능성을 마주하는 태도에 대해 역설한 것이다. 이건 결국 자기 서사의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일 것이다. 방심하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 남이 쓴 '소설 속 인물'로 갇혀 버릴지 모른다. 그럴 때는 빨리 각성하고 남의 소설 속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싸워야 할 대상이 있으면 싸워서라도 반드시 자기 이야기로 돌아와야만 한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도 우리는 싸워야만 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편으로 이번 하루키의 신작은 작가가 과거에 발표했던 단편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가 연상되기도 했다. 사실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를 장편화한 게 '가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플롯이나 설정, 캐릭터를 따져보면 유사점이 많다. 그때는 곧 재앙을 일으킬 땅속 거대 지렁이에 맞서 싸웠다. 어쩌면 슈퍼히어로 서사일 수도 있다. 다만 '가호'는 철저히 개인의 서사와 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깃든 무수한 타자들, 흰개미 여왕만큼이나 기괴한 그 타자들이 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될 것이다. 서사의 중심에 서서 이 세상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루키 소설답게 소설 속에 고양이가 여럿 등장한다. 하루키의 지난 작품들과 비교하면 평년작 수준에 머물 것 같다. 사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나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처럼 단편이나 중편, 경장편 정도로 썼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 표지에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