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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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실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켄 리우는 자신이 SF를 쓰는 이유에 대해 현실에서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을 때라고 말한 적 있다. 

아무리 고민해도 현실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답이 있다. 현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는 보이지 않는 답.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런 문제에 종종 직면한다. 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는 단호한 질문들. 조금도 옮겨놓을 수 없을 만큼 육중한 하중을 자랑하며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선 문제들. 

상상력이 필요한 순간은 바로 그런 때다. 저 단호하고 육중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미래라면.

지금 당장은 해결할 수 없지만 먼 훗날이면 해결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때가 올 수 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시간이 지나며 해결됐는지. 그때는 크나큰 문제였던 것이 지금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해결된 것만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식의 변화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다. 

지금 당장은 지독히 슬픈 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길 수 있는, 심지어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돌아볼 때면 어느새 슬픔은 사라지고 그때의 모든 감정과 기억들이 아련한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당장은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암담한 문제 같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만 인식이 바뀌면, 그렇게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변화하면 문제는 문제 아닌 것이 되고, 문제였던 게 오히려 그리움이 되고, 대립했던 적이 끌어안는 동지가 되기도 한다. 


SF를 쓴다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일일지 모른다. 상상력을 통해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 변화의 여지를 마련하는 것. 당장은 '안 돼'라고 외치며 절망하고 싶은 마음도,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에도 좌절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조금 더 긴 시간이 흐른 후를 상정하여 보는 것. 더 시간이 흐른 후, 더 미래에는 어떨까를 생각해 보는 것. 

당장 답이 안 보이는 문제이고, 당장 절망적인 현실이라고 해도 미래를 상상하면 마음이 바뀔 수 있다. 풀리지 않던 게 풀리기도 하고, 적어도 풀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은 가질 수 있다. 지금 당장 달에서, 화성에서 지구인이 살 수는 없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다. 먼 미래, 그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당장 빛의 속도로 갈 수는 없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다. 먼 훗날, 빛보다 빠른 속도로 우주를 날아가는 우리를. 

아니 꼭 달에서, 화성에서 살아갈 필요도 없다. 빛의 속도로 가야만 할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인식이 바뀌면 현실에서도 만족하고, 답을 찾을 수 있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시간의 힘일 수도 있다. 한참 시간이 흐른다면 지금의 문제, 지금의 현실, 지금의 나에서 보다 거리감을 두고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더 이성적인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달에 가지 않으면, 화성에 가지 않으면,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없으면 도통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문제도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답에 근접해 가고, 정답이 아닌 해답은 찾을 수 있고,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찾을 수 있고, 성공은 아니더라도 만족과 행복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SF가 현실에 작용할 수 있는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김초엽의 소설에서 이런 미덕이 드러났다. 사실 생각지도 못했던 발견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작가의 SF를 읽고 만족스러웠던 적이 거의 없었다. 김희선의 '골든에이지' 같은 작품 말고는 SF만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드물었다. 충분히 현실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는 이야기, 혹은 현실과 유리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읽히는 재미'가 없었다. 작년에 출간되어 큰 화제를 모았던 이 작품집을 이제야 읽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초엽의 작품은 그동안 한국 SF 소설에 가졌던 내 시들한 감정을 일소시키기에 충분했다. 일전에 읽었던 이영도의 '오버 더 호라이즌'이 한국 판타지 소설에 가졌던 숱한 실망감을 상쇄시켜줬던 것처럼.  

첫 번째 수록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읽으면서 벌써 등줄기로 긴장감이 흐르며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환희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펙트럼', '공생가설'을 읽으면서 점점 더 이야기에 매료되고, 작가의 세계관에 이끌리는 것을 느꼈다. 네 번째 수록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마침내 이 작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록작 모두가 고르게 좋은 편이었지만 특히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답을 얻기 위해 쓰인 소설이었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고 싶으나 당장은 그럴 수 없어 미래로, 미래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먼 훗날을 끊임없이 기약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에서 김희선의 '골든에이지'에서 느꼈던 애잔하고 아련한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먼 미래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것, 시간의 간극에서 밀려오는 그리움과 추억을 상기하는 것. 여기에 SF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을 용서하고, 잊게 하고, 변화시키고, 답을 찾게 하고 또 많은 것을 끌어안게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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