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깊은 집 문지클래식 2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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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든 작품이다. 근자에 이 정도로 감명을 준 책은 없었던 것 같다. 별점을 매기자면 국내 작가의 작품집 가운데서 실로 오랜만에 별 다섯을 서슴없이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사실 이 책이 훌륭할 것이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읽을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느낌표 도서로 선정되어 화제를 불러모았을 때는 일부 책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미디어에 대한 반발심리로 일부러 읽지 않았고, 이후에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다른 일을 하는 중에 책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마당 깊은 집'이란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1 때 국어 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시인을 꿈꾸던 국어 선생님은 수업에 앞서 '추천 도서' 목록을 칠판 한 구석에 판서해 놓곤 했다. , 소설을 가리지 않고, 고등학생이 읽을 만한, 근자의 문학 작품들을 소개했던 것인데, 시인 지망생답게 주로 시집이 많았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장석주의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 때', 이갑수의 '신은 망했다', 장정일의 '길안에서 택시잡기' 등의 시집 제목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고, 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 같은 소설집도 기억이 난다. 그때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도 소개되어 내용까지도 간단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그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책들은 어린 내 마음에 큰 동요를 일으켰다. 우선 제목만으로도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고, 발췌해서 낭독해주는 시 한 편이나, 짧게 들려주는 책 내용이 또 한 번 가슴에 격랑을 일으켰다. 그 시절 나는 무척 예민한 상태였고, 은연중에 '영화''문학'이 내 예민한 감정을 다스려줄 거라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국어 선생님이 소개한 책들은 모두 읽고 싶었고, 섭렵하고 싶은 기분에 금방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불우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책 제목을 곱씹고 기억해두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삼켜야 했고, 그 책들을 읽거나 구입한 것은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였다. 하나씩 읽어나간 작품들은 모두 감탄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선생님이 왜 어린 제자들에게 굳이 추천하고자 했던지 그 이유를 알게 했다. 그 때의 리스트 가운데 거의 마지막으로 읽게 된 작품이 바로 '마당 깊은 집'이 되는 것이다.

 

 

이호철과 더불어 김원일은 분단 문학의 대표 주자로 손꼽힌다. 수많은 문학 작품을 통해 한국전쟁과 분단 현실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했고, 또 이념의 대립 앞에 갈등하고 고뇌하는 인간 내면을 해부해 왔다. 거기엔 당연히 그 시절을 겪어온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다. 김원일의 소설이 다루는 주제의 중압감과는 별개로 소설이 재미있게 잘 읽히는 데는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기억의 복원이 한몫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 크게 공감하고 실감나는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사람이라도 작가의 경험이 담긴 생생한 언어 속에서 보편적인 감동과 재미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마당 깊은 집'은 특히나 작가의 어린 시절 체험담이 고스란히 담긴 자전적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전쟁' 그 자체 보다는 그 이후의 '가난''갈등'에 대해 그리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화자가 '마당 깊은 집'에서 보낸 한 시절을 이야기한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짧을 수도 있지만 배고픈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화자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마당 깊은 집이라 불린 그곳에는 각자의 사연을 안고 모여든 다섯 식구들이 있다. 사람도 많고, 말도 많고, 그래서 사연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그들의 이야기. 저마다 껴안고 있던 그들의 걱정들. 그들이 안고 있던 걱정은 그들만의 걱정이 아니었고,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 시절을 살아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던 문제였고, 등이 휠 것처럼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전쟁이 휩쓸고 간 땅 위엔 거대한 가난이 내려앉아 있었다. 가난은 어른들의 가슴을 피멍들게 하고, 아이들의 가냘픈 어깨마저 짓눌렀다. 그 와중에 끝나지 않은 이념의 대립으로 고뇌하고 갈등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쟁이 남긴 그림자는 가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당 깊은 집에서 한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사람들도 전쟁이 남긴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기 위해 아등바등거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쨌거나 살아갔다. 14살의 소년은 삯바늘질로 생계를 꾸려가는 홀어머니를 도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피로와 허기, 추위와 불안감으로 소년의 심신은 나날이 지쳐갔지만 그래도 다음날이 되면 다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야만 한다. 삶을, 어쨌거나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 시절 마당 깊은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돌아보면 아득한 그 시절. 나는 겪어보지도 않았던 그 시절이 마치 내 이야기라도 되는 양 무척이나 몰입해서 책을 읽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하거나 감동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특정한 시절을 다루고 있다지만 가난은 지금도 도처에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체험에서 비롯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생생히 복원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문학적 서정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화자의 막내동생 길수에게 가장 연민이 갔는데, 그럼에도 작가는 그 아이의 이야기를 신파처럼 그리지 않고, 유머와 서정미를 가미해 아름다운 동화처럼, 꿈처럼 그려냈다. 사람살이란게 그렇듯 아무리 현실이 각박해도 그 안에 희로애락이 존재하는 법. 현실을 꿋꿋이 버티고, 이겨나가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애처로운 여백을 작가는 따뜻한 웃음과 서정미로 채워간 것이다. 드라마가 살아 있고, 감동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역시나 잘 쓴 소설임이 분명하고, 읽고나면 시인 지망생 선생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타인에게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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