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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아주 익숙한, 오래전에 쓴 것 같은...
하루키는 참 스타일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이번 신작 단편집을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심지어 글 솜씨조차도 그때 그 수준에서 향상되거나 변화한 게 거의 없는 것 같다. 첫 작품에서 자신의 스타일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일직선으로 똑바로 걷는 듯 밋밋하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어느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면서 끝나는 식의 작법 스타일(혹은 그 반대일 수도). 여기에 맥락 없이 끼어드는 음악과 야구 이야기. 그리고 여자 이야기.
하루키는 여전히 소년성을 버리지 못했고, 여자에 대한 소년적인 판타지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잘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남자 주인공(스스로도 확실하게 인정하는)을 어쨌거나 좋아하고 집착까지 하는 여자들이 꼭 등장한다. 그 여자들과 어쩐지 손쉽게 가까워지고 손쉽게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도 여전하다. 그런 일상과 삶, 관계와 관념이 별것 아니라는 듯, 아무 관심 없다는 듯(사실은 굉장히 관심 있으면서. 어쩌면 온통 그 관심뿐면서) 건조하게 그려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인간을,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변했을 법도 한데, 칠십을 넘긴 노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데뷔작을 지배했던 소년의 눈 그대로인 것 같다. 그 눈을 계속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겉으로는 아닌 척, 쿨한 척하지만 자기 안의 소년성이 사라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붙잡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어쩌면 그 시선을 견지하는 것이 글쓰기를 유지하는 하루키만의 동력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번 소설집에서도 그런 시선, 특유의 일인칭 소년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과 타자, 삶의 단면들을 여전히 무미건조하고 별 볼일 없이(별 볼일 없는 척) 그리고 있다. 아닌 척하면서도 소년이 어른을 흉내 내는 것처럼 꽤나 겉멋을 부리고 있다는 느낌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번 소설집의 색깔은 유난히 하루키의 초기 작품들의 분위기와 닮아 있다. 하루키의 초기 단편들은 대게 무미건조한 청춘 남녀의 일상 혹은 중년 남자와 소녀(혹은 묘령의 여자)의 우연한 만남, 술집에서 누군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털어놓는 회고담 같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아니면 정말 엉뚱하게 야구나 음악에 대한 보고서 같은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따라 읽지만, 굳이 두 번은 읽고 싶지 않고, 대부분 한 번 읽고 난 후에 금방 내용(내용이라고 할만한 게 없는 게 대부분이지만)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하루키의 단편 중에는 간혹 미스터리와 판타지가 섞인 일탈적인 이야기도 있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빵 가게 재습격',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 '렉싱턴의 유령' 같은 작품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루키의 새로운 단편집을 읽을 때마다 내가 기대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아쉽게도 '일인칭 단수'에 수록된 모든 단편들은 내가 기대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그저 무미건조한 남녀의 이야기, 혹은 어떤 회고담 같은 것, 엉뚱하게 등장하는 야구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럭저럭 따라 읽기는 하지만 두 번은 읽고 싶지 않고, 읽고 나면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그래서 이번 작품집이 내게는 하루키 스타일을 다시 확인하는 복습과도 같았다. 특별한 내용 없이 하루키 스타일만 견고하게 살아 있는, 무미건조하고 어떤 면에서는 에세이나 습작 같은 느낌이 나는, 하루키를 우려낸 재탕 같은, 그럼에도 그럭저럭 읽히는 단편들.
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이 작품이 정말로 하루키의 최신작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출판 인쇄 날짜로서의 최신작이 아니라 책 속에 수록된 작품(원고)들이 집필되고 완성된 날짜로서의 최신작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러니까 '여자 없는 남자들'과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쓰고, 벨트 문학상과 안데르센 문학상까지 수상한 이후, 혹은 그 즈음에 쓴, 2010년대의 삶을 살아가면서 2010년대의 의식과 시선으로 쓴 (최신)단편들이 맞는지. 혹시 아주 오래전 데뷔 시절에 쓴, 무렵에는 발표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서랍 속에 묵혀 두었던, 먼지 묻은 습작 같은 원고들을 이제야 끄집어 내 신작 소설집인 양 묶어 낸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하루키는 왜 자신의 재탕과도 같고, 자기 스타일의 복습과도 같은 이런 단편들을 근자에 열심히 썼던 것일까. 그리고 그 원고들을 묶어 출판하기에 이른 것일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나와 같은 하루키 마니아들에게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이 얼마만큼의 새로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어떤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새로운 감동도 의미도 없다면 그 책은 아무리 최신작이라고 하더라도 굳이 세상에 나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유난히 감동도 의미도 찾기 힘든, 재탕과도 같고, 이미 다 아는 내용의 복습과도 같은 하루키의 신작 소설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