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란 이야기를 잘 만들어 내는 사람인가, 문장을 잘 쓰는 사람인가... 눈 앞에 없었던 새로운 풍경과 인물과 이야기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사람이 훌륭한 소설가인가, 아니면 눈 앞에 있는 낯익은 풍경과 인물과 이야기들을 낯선 묘사와 비유로 새롭게 포장해 내는 사람이 훌륭한 소설가인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의 소설이 더 훌륭한가,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의 소설이 더 훌륭한가...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는지 쉽게 말 할 수는 없지만,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갖추지 못 한다면 좋은 소설가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소설가라면 적어도 상상력이든 관찰력이든 둘 중 하나는 확실히 뛰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설가들, 특히 단편을 주로 쓰는 여류 소설가들의 경우는 대부분 상상력보다 관찰력이 더 좋은 것 같다. 소설집 '틈새'로 2006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혜경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혜경의 소설 속에서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인다.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타자와 쉽게 섞이지 못 하는 인간들의 한숨어린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자 해도 온전한 식구로 받아들여지지 못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고, 긴밀하게 다가오려는 타인들로부터 자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선을 긋거나, 관심과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집단의 위선과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꼭꼭 문을 걸어잠그는 현대인들이 있고, 핏줄로 인정받기 위해, 혹은 핏줄임을 부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족속들이 있다.
이런 식의 이야기나 인물들은 지금껏 수많은 한국 단편 소설들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이혜경의 소설이 갖는 새로움은 이야기나 인물들에 있지 않다. 일상의 소묘를 자신만의 색깔로 그려낼 줄 아는, '이혜경만의 문장'들이 진부할 것 같은 소설들을 진부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들에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묘사와 비유, 새로운 관찰과 주제들이 담겨 있다. 나와 타인을 구분짓는 삶의 경계선들, 혹은 그 경계선들에서 조금씩 균열이 발생하며 생기는 작은 틈새들... 이혜경의 세심하고 애정어린 시선은 그 틈새에서 벌어지는 작은 현상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 작은 틈새 속에서 뿜어져나오는 광활한 진리와 가치를 소설 속에 담아낼 줄 안다. 씨앗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상에서 아름드리의 고목 같은 거대한 삶의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 그것이 '틈새'를 읽는 재미다.
아홉 편의 단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든 소설은 맨 마지막에 실린 '늑대가 나타났다'이다. 선 밖으로 나가면 늑대들에게 잡아 먹힌다. 선 밖으로 나가지 마라. 어른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선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아이는 문득 늑대들은 선 안에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선 밖으로 나가지 못 하게 아이들을 잡아두고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이들은 늑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어둠속에서 연약하고 순수한 것들을 상처입히고 파괴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는 늑대들은 진정 선 밖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이 소설은 분량상으로 가장 짧은 소설인데 가장 재미있게 읽혔으며,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와 함께 삶에 대한 섬뜩하고 묵직한 감동을 일깨워주는 수작이다.
그 밖에 표제작 '틈새'와 '문 밖에서', '망태할아버지 저기 오시네' 등이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새로운 비유와 멋진 묘사, 가슴을 찌르듯 명확하게 와닿는 예리한 주제들에 감탄을 했던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