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캐비닛은 우스꽝스런 유머끝에서 쓸쓸한 연민과 공포가 캐비닛 속의 오래된 먼지처럼 풀풀 날리는 소설이다.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에서 보여준 작가 특유의 페이소스섞인 유머와 예리한 은유가 이번 장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소설을 읽는 순간 종종 '참, 인생이란~' 혹은 '참, 세상 산다는 게~'같은 푸념과 한숨이 나왔다. 웃겼지만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냥 우스꽝스러웠다. 인간이란 게, 세상이란 게... 그래 알고보면 참, 우스꽝스러운 것이지...

심토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심토머란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을 일컫는 (물론 작가가 지어낸)용어다. 심토머들에 대한 갖가지 사연들이 문서화되어 13호 캐비닛 속에 보관되어 있다. 작가는 그 캐비닛을 열어 그 속에 담긴 풍경들을 보여준다.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혀가 도마뱀으로 바뀌는 사람, 이쑤시개를 닮아 가는 사람, 종종 길고 긴 잠에 빠지는 사람, 시간을 수시로 잃어버리는 사람, 끊임없이 자신의 분신을 태우는 사람, 고양이가 되고싶어 하는 사람, 태백산 아래에 살고 있는 마법사, 외계인에게 무선 통신을 보내는 사람(외계인)들... 이런 기구한 운명과 사연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13호 캐비닛 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기발한 상상력에 애처로운 유머와 페이소스가 적절히 녹아 있다. 또 소재를 잘만한 소설 쓰기의 편안함 같은 게 느껴진다는 심사평처럼 기발한 소재와 상상력의 조화가 강렬한 흡인력으로도 이어져 책장이 빠르게 넘어간다. 역시 김언수라는 작가의 역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한마디로 소설을 재미있게 쓸 줄 아는 작가인 것이다. 국내 작가중에서 이러한 재능을 지닌 작가는 귀할 정도로 드물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의 대중적인 부상이 반갑다.

아쉬웠던 점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다소 동어 반복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역시 은희경이 지적한 대로 너무 길게 늘인 소설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작년에 세계문학상 최종 후보로도 올라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와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었다. 작가 인터뷰를 보니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세계문학상 응모를 목적으로 쓴 소설이 '캐비닛'이었다고 했다. 때문에 분량을 세계문학상 공모규정에 맞추기 위해 소설이 불가피하게 늘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이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씌어졌다면, 원고지 800~1000매 이하로 탈고가 되었을 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었다면 더 꽉 짜여진 탄탄한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도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처음부터 작가가 이 정도로 길게 쓸 것이라고 작정을 하고 쓴 소설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소설이 다소 동어 반복적이고, 늘어진 것 같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에피소드들을 몇 개 더 우겨 넣은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작가가 애써 상상해 낸 이야기들이 아까워서 모두 다 넣고 싶은 욕심이 발동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소설은 그런 식으로 에피소드들을 얼마든지 더 집어넣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으니까) 또 하나 아쉬운 점은 결말이다. 스파이 첩보물 같은 방식으로 긴박하게 라스트를 이끈 것은 환영할만한 했으나 결말을 매끈하게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앞부분에서 다소 동어반복적이었던 에피소드들을 몇 개 빼내는 한이 있더라도 라스트에 지면을 더 할애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소설이다. 이만큼 재미있는 한국 장편소설을 읽은 것은... 작년 여름 '뿌리 깊은 나무' 이후 처음인 것 같다.(그 사이에 읽은 달콤한 나의 도시, 핑퐁 등은 모두 캐비닛만 못 하다) 이 정도 소설이라면 짜장면 세 그릇 값을 아껴서라도 책값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국내 작가들의 소설이 캐비닛만큼만 재밌다면 글쎄... 문학의 위기 운운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보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