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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의 소설을 손에 들고 첫 페이지를 열면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또 어떤 이야기로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지, 또 어떤 생활의 발견이, 어떤 감동이, 혹은 울림이 담겨져 있을 것인지... 자못 기대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혹자는 하루키의 소설이 점점 더 재미 없어진다느니, 문학적 가치가 떨어 진다느니, 과대평가된 작가라느니 하는 소리들을 한다.
나는 모르겠다. 나에게 하루키는 언제나 훌륭했고, 그의 소설들은 늘 멋졌다. 딱 한작품(「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만 빼고... 물론 「태엽감는 새」이후, 더 이상의 큰 발전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현상유지는 하고 있는 것이다. 절정에 올라선 이후 그 솜씨 그대로 꾸준히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또 다른 절정으로 오르기 위한 숨고르기 기간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도쿄 기담집」을 아주 재미있고, 만족스럽게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다섯편의 단편들은 모두 우연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들이다. 우연히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가 누나가 유방암 수술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게이 남자가 있고, 아들이 상어에게 물려 죽은 해변에 머물다가 우연히 아들의 혼령을 보았다는 젊은이들을 만나는 여인이 있고, 24층과 26층 사이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20일 후에 우연히 먼곳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남자가 있고,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진 신상을 알 수 없는 매력적인 여자가 운명의 여자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남자가 있고, 젊은 날 우연히 자신을 방문했던 한 후배가 자살을 하게 되고, 그 후배와 자신의 이름을 원숭이에게 도둑맞게 되는 한 여인이 있다.
물론 우연은 우연이 아닐수도 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작가도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따름이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며 하루키의 작가적 역량에 나는 다시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작가만큼 생활을, 인간을, 인생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고 탐구할줄 아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다. 하루키는 이런 장점으로 충만한 작가다. 관찰자로서의 능력이 훌륭한 것이다. 그런 능력 위에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 넘치는 매끄러운 필력이 가미되어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문장들이 완성되는 것이다.
소박한 일상처럼 시작한 이야기가 조금씩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싶은 순간 독자의 가슴 속으로 큰 울림이 전달된다. 이 작은 이야기들 하나 하나가 끝날 때마다 읽는 이는 생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그런 위대하고 감동적인 힘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