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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처럼 이 사건은 미궁으로 남겨진 하오키사건의 진실을 쫓는 신견이란 사내의 일지이다.
이 십여년 전, 도쿄 네리마 구의 민가에서 히오키 다케시(45)라는 남성과 그의 아내 유리(39), 그리고 그의 장남 다이치(15)가 시체로 발견되고 장녀인 사나에(12)만이 살아남은 사건이 발생한다.
문은 안으로 잠겨있고 유일한 출구인 창문은 너무나 작고 비스듬해서 갓난아이나 겨우 드나들 정도였다.
유리는 알몸인 채였고 시체주변에는 색종이로 접힌 학이 뒤덮여 있는 기인한 모습이었다.
살아남은 사나에의 파자마에는 오빠인 다이치의 정액이 묻어있었지만 성폭행의 흔적은 없었다.
범인은 피해자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낼만큼 큰 덩치로 왼손잡이로 짐작되는 인물이었다.
그 무렵 동네에서는 빈집털이범이 극성이었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근처에서는 수면제가 든 음료수를 나눠주는 이상환 사나이가 나타나곤 해서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바로 그 사나이가 지목되어 체포되었지만 범인이라 할 만한 증거는 전혀 없었고 더구나 안으로 잠긴 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못한 채 풀어주고 만다. 결국 이 사건은 미궁속에 잠긴 채 22년이 흘러 우연히 신견을 찾아온 탐정에 의해 부활하게 된다.
우연히 술집에서 사나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게 된 신견은 그녀의 집에 걸려있던 의문의 남자양복을 입고 출근을 하게 되고 퇴근길에
그를 찾아온 탐정에 의해 실종된 남자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 역시 사나에의 집에 드나들었던 사내로 어느 날 사라지고 말았는데 다니던 회사의 관계자들이 그의 행방을 탐정에게 의뢰한 것이다.
"사나에의 집 베란다에 있는 큰 화분속에 혹시 그 남자의 시체가 있는지 확인해 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신견은 처음에 거절하지만 결국 사나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고 사나에는 화분속을 뒤집어가면서 시체가 없음을 확인해준다.
탐정에게 실종된 남자의 사체가 사나에의 집 화분에 없음을 통보하자 그는 사나에게 사실은 오래전 미궁에 빠진 채 잊혀졌던 하오키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임을 알려준다.
신견에게는 어린 시절 R이라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이 있었다.
이제 겨우 발걸음을 뗄 무렵즈음 그의 어머니는 그를 공원에 버려둔채 사라지고 그는 여러곳을 전전하다 겨우 아버지에 의해 길러지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의 내면에는 어두운 상처가 고여있었고 유일하게 그와 소통하는 것은 바로 R이란 가상의 인물이었다.
늘 잔인한 범죄의 가해자가 되어보는 상상을 즐기던 신견은 평범하게 살아보려는 노력으로 변호사란 직업을 갖기로 하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사법고시를 준비중이지만 열정은 없는 삶이다. 유일하게 살아움직이는 욕망은 성욕 뿐이다.
그런 그에게 하오키사건은 묘한 이끌림을 주게 된다. 미궁에 빠진 밀실살인을 파헤쳐보고 싶다는 호기심보다는 서로 몸을 나누는 사이가 된 사나에에 대한 관심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신견은 예전 사건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찾아다니게 된다. 장남인 다이치가 아버지와 함께 정신과치료를 위해 병원에 드나들었던 사실과 다이치가 그린 그림에서 사건현장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발견된다. 과연 범인은 다이치일까?
호기심이었든 사나에에 대한 관심이었든 미궁사건을 쫓는 신견을 통해 큰 사건후에 일본인들이 겪는 트라우마가 느껴졌다.
특히 어둔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데미지에 약할 수 밖에 없다. 쓰나미나 원전사건에 흔들렸을 그들의 상처가 삶에 어떤 그림자가
되는지 짐작해 본다. 그래서일까 일본인들은 '겸허'라는 태도에 수많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채무사들의 빚을 청산해주는 단순한 일에 아무 의미없이 사무실을 오가던 신견이 직원들을 해고해버리려는 변호사에게 한방 먹이는
장면은 아주 의외의 장면이다. 소외된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는 의지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나에게 쏟아 놓은 사건의 전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독자의 판단에 맏긴 채 마무리가 된다.
수 많은 가정과 의혹을 가슴속에 지닌 신견은 그래도 사나에를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품어준다.
이미 그는 어떤 결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디는 법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미스터리물이나 스릴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극이라는 것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부부의 삶이, 부모의 삶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