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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하트 -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는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지나가버리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지나가버린 사랑을 깨닫고 서른일곱의 미연은 말한다.
전문대학을 나와 사이버대학을 다시 졸업하고 몇 번의 직장을 거치다가 해드헌터가 된 미연은
이십대라는 단어를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것같은 그런 20대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20대는 있다. 하지만 지금 서있는 나이가 늘 낯설게 느껴지는건 나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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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자신보다 앞서가던 여동생 세연은 기자로 자리잡았지만 단지 서울대를 나왔다는 것이 유일한
빽이었던 남자와 결혼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 물론 불행하다는 건 세연이의 시각이 아니다.
이제 다섯살인 아이를 옆집에 맡기고 갓 6개월인 둘째 아이는 아침 저녁으로 어린이집에 맡기면서
사시 시험을 포기한 백수남편의 밥을 해먹이면서 동동 거릴지라도 말이다.
제법 값나가는 아파트를 대출금을 끼고 무리하게 구입했지만 이미 많이 오른 것은 미연같은 올드미스에게
큰 위안일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바로 윗층에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남자가 잘생긴 아들녀석과 예쁜 마누라를
끼고 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신문광고이거나 잡 코리아같은 매체만 있는 줄 았았다.
하지만 이렇게 치열하게 인력시장을 휘두르는 헤드헌터라는 직업이 있는 줄 몰랐다.
미연에게 학벌, 흔히 SKY라는 훈장은 자신의 석세스를 위한 인력들에게는 필수였지만 다리를 놔주고 성공보수를
받는 헤드헌터의 업무에는 하등 상관이 없는 스펙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나고자 했던 남자들에게 학벌은 중요했던 것일까.
S대 출신의 태환은 그런 그녀의 허영을 충족시켜줄만한 남자처럼 보였다.
채식주의자이며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는 태환의 비위를 맞추는 일쯤은 자신이 있어보였다.
거의 그의 직장근처로 찾아가야 하는 데이트도 그랬고 고기를 좋아하지만 채소식단은 선택하는 일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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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훈이라는 버젓한 이름을 두고도 '흐물'이라 불리는 남자는 멀리 대전에서도 그녀가 부르면 달려오곤
했던 남자였다. 시시한 지방대를 나와 조금은 안락해보이는 공사에 다니는 연하의 그 남자는 미연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너무 편했기에 연하였기에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조금 못생긴 얼굴때문에? 하긴 태환이는 조각처럼 아름다운
남자였지. 하지만 태환에게 미연은 어떤 의미도 아니었음을 나중에야 확인하게 된다.
무작정 대학로로 나와달라는 태환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흐물을 불러 맥주를 마시던 밤.
미연은 태환에게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었다. 뒤에 남겨진 흐물은 서둘러 태환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등 뒤에 이렇게 외쳤지.
'기다릴게.'
'이미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다음,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받아들이고 다시 걸어가는 것.' -282p
헤드헌터라는 직업과 미연의 로맨스는 우리가 분명 보이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아니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에 대한 냉정하지만 어리석은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저 한 사람의 이력서에 기술되는 몇 줄의 스펙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듯이 미연이 만난 남자들의
스펙만 확인했던 시선은 직업이 주는 재앙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달려와주던 남자의 사랑을 진작 알아보았더라면 미연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가막힌 사연이 있었어도 아침이면 시치미를 떼고 화장발처럼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숨어있는 풍속도를 생생하게 살려낸 작가의 시선이 신선하다.
작가는 혹시 헤드헌터였던가. 아님 주변에 그런 지인이 있던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생생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미연의 부실했던 사랑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그러니 어쩌랴. 그것도 인생이니
감내할밖에. 언제든지 다시 일어나 받아들이고 다시 걸어가는 것...그게 인생인걸.
그동안의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에 비해 다소 가벼운 작품이어서 놀랐지만 그러니 어쩌랴.
이게 현실이고 세태이고 우리네 참 모습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