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짧은 철학책 - 인간관계부터 커리어까지, 생각이 많은 나를 위한 철학 수업
크리스토프 크바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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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 리뷰입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출퇴근길, 기계적으로 확인하는 SNS,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잘 살고 있는 걸까?'라는 막연한 의문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일상 속에서 무수한 질문과 마주한다. AI의 발전으로 삶은 비약적으로 편리해졌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질문들은 더욱 심오해졌고, 깊이 사색할 정신적 여유는 턱없이 부족해졌다. 크리스토프 크바르히의 철학책은 짧고 간결해 철학의 무거움이 한결 덜어진 느낌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철학적 논의를 일상적인 질문으로 건드리고, 글의 첫머리에 예 혹은 아니오라는 명쾌한 답을 먼저 내리며 시작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엉킨 나에게 이러한 방식은 명쾌하다. 저자는 직관적인 답변 뒤에 소크라테스, 니체, 한나 아렌트 등 32인 철학자들의 핵심 이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지만 철학적 사유는 꽤나 깊다.

책은 철학사의 연대기적 흐름을 벗어나 현대인이 중심을 잡기 위해 꼭 필요한 8가지 주제(인간관계, 커리어, 사랑, 정치, 생태 등)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내 취향보다 유행을 따라야 성공하지 않을까? 아니오. (p27) 이 짧은 문답 안에 현대인들이 겪은 가장 큰 심리적 갈등과, 이를 치료해 줄 강력한 철학적 처방전이 들어있다. 하이데거는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평판에 휩쓸려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비본래적인 삶'이라고 보았고, 거기서 벗어나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본래적 삶'이라고 했다. 세상이 정해놓은 유행이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며 사는 삶은 결국 나를 잃어버린 가짜 삶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삶의 진정한 중심이 세워진다.

이 내용을 내 삶에 대입해보자면, 남들이 다 찬다는 명품 시계, 유행처럼 들고 다니는 명품 가방을 보며 나도 저걸 가져야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걸까 불안해했던 기억이 스친다. 하이데거 기준대로라면, 나는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느라 진짜 내 취향을 잃어버린채 가짜 삶을 살고 있었던 셈이다.



일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일이 사랑의 표현이냐가 잘 사는 삶의 기준입니다.(p68)

내가 하는 일을 꼭 사랑해야 할까?라는 직장인들의 고질적인 질문에 저자는 세네카의 입을 빌려 '아니오'라고 답한다. 당위적인 의무감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내 본성에 맞는 일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고 몰입하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명절마다 '며느리의 도리'라는 의무감에 짓눌려 억지로 시부모님을 위한 요리를 거창하게 차려내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내 본성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이 강요한 피로한 노동이었을 뿐이다. 반면, 정말 소중한 이들을 위해 대가 없이 기쁜 마음으로 따뜻한 밥상을 차려냈을 때는 전혀 다른 충만함을 느꼈다. 세네카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일의 종류나 양이 아니라, 그 일이 온전히 나의 진심을 표현하는 통로가 되고 있느냐는 사실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피로감을 느낄 때도 이 책은 도움이 된다.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해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에 쇼펜하우어의 감정 철학과 에디트 슈타인의 의식 경험을 가져와, 인공지능은 결코 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공감과 느껴짐의 영역을 설명한다. 부모 자식 간의 돌봄 문제에서는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기후위기 시대의 행동 양식에서는 한스 요나스의 생태학적 정언명령을 통해 일상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든다.

정보가 넘쳐나 도리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쉬운 요즘이다.이러한 때에 이 책은 사고를 유연하게 풀어주고, 독창성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수많은 가치관의 대립 속에서 나만의 중심을 세우고 싶다면 읽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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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을 긋다, 마음을 잇다
이향숙·강숙아·김상철·이미자·이은정·임해숙·조시원·조숙희·지선령·황경애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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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열 명의 작가가 평범하지만 치열한 자신의 삶 속에서 붙잡고 느꼈던 한 줄의 문장을 기록한 에세이 공저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의 솔직하고 순박한 모습들이 담겨 있어 공감이 된다.

빅터 프랭클, 나폴레온 힐, 기시미 이치로, 쇼펜하우어, 스티븐 코비 등 시대를 아우르는 거장들의 문장이 나온다. 작가들의 힘겨운 일상에 이 문장들은 어떻게 스며들었고, 어떤 행동으로 유도했는지 그 과정을 전달한다.

공저자로 참여한 열 명의 작가는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며 새벽을 견딘 박사, 25년간 갈등을 겪으며 음악학원을 운영한 원장, 40년간 숫자로 타인의 인생을 계산한 세무 전문가, 뇌종양 진단과 갑상선암 수술 후 삶을 돌아본 학자와 명상지도자, 사업 실패를 겪은 사업가, 요양보호 현장의 작가, 그리고 제주의 가장 등 우리 곁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이웃들이다. 이들이 새벽녘 노트북 앞에서 혹은 무너진 일상 속에서 매달린 날것 그대로의 감정과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고백을 읽으며 나 역시 개인적인 기억을 꺼내본다. 마음이 서늘할 때면 책을 펼쳐 들고 사프를 꺼내어 자를 대고 줄을 친다. 검은 활자 위로 눌러 그은 곧은 선들은 흔들리는 일상을 붙잡아보려던 나만의 다짐이자, 길을 잃지 않고 싶은 마음의 방향표였다. 밑줄 친 문장 옆 여백에 나만의 내밀한 감정들을 적어 내려가던 행위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 행위만으로도 다시 걸어갈 힘을 얻었던 것 같다.

"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그 일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다."

"다른 사람의 행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힘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자기를 위한 시간과 에너지가 소진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한 만큼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 멜 로빈스, <LET THEM 렛뎀 이론>


3장에서 가장 마음에 위안을 받았던 문장들이고 이론이다. 내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영역(그들의 생각, 감정, 행동)을 인정하고, 오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반응과 내면의 평온에만 집중하겠다는 주체적인 결단이다. 나 역시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하며 늘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당신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에 깊은 실망과 상처를 안았던 경험이 있다.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헛된 노력을 멈추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순간, 시어머니라는 무거운 존재로부터 내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진정한 위안을 얻고자 한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그 일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시어머님의 이기적인 행동과 그로 인해 상처받았던 상황 자체는 이미 벌어진 일이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 행동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는 온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영역이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렛 뎀(Let them)의 태도로 반응의 키를 내가 쥐고 단단하게 나를 지키고 내 삶을 살 것을 다짐한다.

이 책은 총 4개의 장으로 관계를 덜어내고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안도감부터, 역경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두려움을 넘어서며, 결국 실패 속에서도 삶을 기록해 내 삶의 주어로 다시 서는 과정을 다룬다. 편하게 한 페이지씩 펼쳐보며 숨을 고를 수 있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열 명의 작가가 다채롭고 성실한 회복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어서, 따뜻한 위안과 공감이 많이 된다. 가볍게 읽어보기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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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더’ 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결정적 행동 원칙
닉 베어 지음, 김현정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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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 더 한다는 것이 어지간한 결단이 없으면 쉽게 되지 않는다. 피곤하거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이 정도면 충분해라며 스스로와 타협하고 멈춰 섰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무조건 버티는 미련한 인내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한 번 더 움직이는 실행의 중요성을 본인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저자 닉 베어는 미국의 기업가, 운동선수, 유튜버이자 작가로, 북미 2030 세대 사이에서 '한 번 더(Go One More)'신드롬을 일으킨 인물이다.

남들이 만족하고 돌아설 때 움직이는 그 한 번의 차이가 결국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는 원칙에 공감이 된다. 그동안 끈기가 부족하다고 자책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고, 진짜 문제는 의지력의 크기가 아니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돌파하는 구체적인 태도의 부재였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려운 일을 선택해서 자신의 신념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첫 번째 단계는 결의를 다지는 것, 두 번째는 그 과정을 견뎌내는 것, 세 번째는 목표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모든 측면에서 성공과 성장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다. 어느 하나라도 소홀할 수 없다. (p29)

결의를 다지고, 과정을 견뎌내며, 결국 목표를 실행하는 이 세 단계는 머리로 아는 것보다 몸으로 부딪쳐낼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익숙한 안정을 뒤로하고 전혀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던 도전의 순간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해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지만, 막상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매 순간이 고비이자 슬럼프의 연속이다.

실패와 성장의 갈림길은 결국 이 과정을 어떻게 견디고 마지막 실행까지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매번 중간에 지쳐 타협하고 싶을 때마다 이 세 가지 단계 중 내가 어디서 흔들리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어느 단계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끈기야말로, 내가 선택한 길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경험을 통해 실감한다.

저자가 겪은 섭식장애는 삶을 무너뜨릴 뻔한 거대한 시련이었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그의 인생에 가장 긍정적인 전환점이자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강박적인 식단과 신체에 대한 집착을 건강한 운동과 영양학에 대한 열정으로 녹여냈고, 훗날 글로벌 영양 보충제 기업(BPN)을 창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장 어두웠던 상처를 삶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바꾼 셈이다

책을 읽으며 그동안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지 못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거창한 의지를 다졌음에도 중간에 무너졌던 이유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기보다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다시 움직일 구체적인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강조하는 '한 번 더'의 핵심은 목적이 뚜렷한 선택과 행동이다.

매번 작심삼일로 끝나던 목표 관리나 쉽게 흔들리던 자기 확신을 다잡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통제하고 기꺼이 어렵고 옳은 길을 택하는 꾸준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꾸준함이 복리로 쌓여 결국 성장을 만들어낸다는 부분에서는 반성과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삶을 바꾸는 것은 극적인 변화가 아닌 무너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반복의 힘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역방향 계획이나 루틴을 회복하는 현실적인 실행 전략들을 보며, 일상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한계선 위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지 명확해졌다.

혼란을 받아들이고 성장을 위해 불편한 선택을 이어가는 태도야말로 스스로 동력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앞으로 힘에 부치는 순간이 오더라도 무작정 견디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보다, 왜 이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지 되새기며 딱 한 번 더 시도하는 삶을 살아봐야겠다.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결단이 결승선을 통과하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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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감각 수업
나도움.박길영 지음 / 책스미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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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미묘한 반발심이 생겼다. 감각이란 본래 인간이 타고나거나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득하는 아날로그적인 영역인 반면 AI는 철저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디지털의 정점이다. 차갑고 정교한 AI에 감각이라는 인간적인 단어를 나란히 붙인다는 것이 과연 유효할지 의아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 어색한 조합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것에 수긍하게 된다. 저자들은 AI를 다루는 테크닉이 아니라, 도구 앞에 선 인간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은 강의실에서 저만 모르는 것 같다 라며 망설이던 한 사람의 고백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겉으로는 기술에 대한 뒤처짐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과연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현대인의 불안을 담고 있다.

막연한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우리가 AI 시대를 살아가며 회복해야 할 여덟 가지 감각(두려움, 질문, 의심, 책임, 경계, 경험, 타이밍, 사람)을 설명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인간 내면의 단단함이 필요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자연스러운 문장에 속지 않으려면, 눈으로만 읽어서는 부족하다. 가수가 음을 듣듯이, 결과물의 작은 어긋남을 듣는 귀가 필요하다.(p83)

기술의 유용성 뒤에 숨은 함정을 경고하는 의심 감각과 책임 감각의 영역은 흥미롭다. AI는 틀린 말조차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포장을 해낸다. 책 속 표현대로 틀린 말이 매끄러운 문장으로 다가오면 인간은 쉽게 매료되고 비판적 사고를 멈추게 된다. AI가 매끄럽고 완벽해 보이는 결과물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최종 승인 버튼을 누르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생산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지더라도 최종적인 선택과 책임은 온전히 인간의 몫이라는 선언이다. AI에게 단순히 작업을 맡기는 것과 도구로 쓰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하며, 창작자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과 윤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여덟 가지 감각을 거쳐 마지막으로 닿는 곳은 결국 도구 너머의 인간을 바라보는 사람 감각이다. '사람은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자라날 뿐이다(P185).'라는 문장처럼, 효율성과 속도만을 강조하는 디지털 세계관 속에서 인간 고유의 성장과 느림의 가치에 주목한다.

책은 AI를 만났을 때 오히려 인간이 더 바빠져야 한다고 말한다. 더 정확히 묻기 위해 입을 열고, AI가 내놓은 매끄러운 거짓말에 속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며, 마지막 검수 버튼을 누르는 책임의 과정이 그렇다. 이렇듯 도구를 통해 오히려 더 깊은 사유와 신중함을 요구하는 역설적인 제안들이 꽤나 흥미롭고 신선하다. 도구가 아무리 화려하게 변모해도 결국 그 도구가 향하는 곳은 사람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는다면, 새로운 기술은 두려움이 아닌 세계를 확장하는 든든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급변하는 기술의 속도 앞에서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남몰래 불안해했던 이들, AI를 일상적으로 쓰면서도 문득 편리함 뒤에 숨은 공허함을 느꼈던 창작자나, 도구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자신만의 주관을 지키며 일하고 싶은 모든 이들이 읽어보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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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방에 내가 없다
권지연 외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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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여덟 여성이 가방이라는 일상적인 사물을 단서로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간 9개월의 기록을 담았다. 산부인과 의사, 공무원, 워킹맘 등 직업도 사연도 다른 이들은 글쓰기 플랫폼에서 만나 서로의 글을 고치며 하나의 목소리를 완성한다.

이들의 가방 속은 가족의 약, 아이의 간식, 빛바랜 영수증으로 무겁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립스틱 한 자루나 거울 한 장은 없다.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 직장인으로 살아가며 정작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온 우리 시대 여성들의 자화상이 가방이라는 사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며 나역시 자연스럽게 나의 가방을 돌아보고, 그동안 외면했던 스스로의 결핍과 마주하는 감정을 느낀다.

이번에 꾸리는 가방 안에는 조금 다른 풍경을 담으려 한다. 아이를 위한 물건들 틈새로, 내가 좋아하는 책 한 권과 '나'라는 이름 석 자를 잊지 않고 챙겨 넣을 것이다(P79). 내 경우에도 늘 가족의 필요나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가방 속에 가득 채우고 다니느라 어깨가 무거웠던 기억이 있다. 가방이 무거워질수록 정작 나 자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 문장은 내 삶의 주도권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진다.






가방 안쪽 깊숙한 곳처럼 손이 닿지 않아 잊고 지내던 자리. 아이를 챙기느라 밀어 두었던 마음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 마음을 가방 앞 칸으로 옮겨 두려 한다. 가장 먼저 손이 닿는 곳에. 오래 비워 둔 자리를 조금씩 채워간다. 뒤로 밀려나 있던 내가 천천히 돌아온다(P108).

가족을 돌보고 일상을 지켜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 나의 마음을 가방 구석에 밀어 넣어 두었는지 느껴졌다. 내 경험을 돌이켜보아도 늘 아이의 필요와 일상의 의무들이 가방 앞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생각과 감정, 배우고 싶은 열망 같은 것들은 늘 뒷전이었고, 그렇게 밀려난 마음들은 가방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곤 했다. 오래 비워 둔 자리를 나만의 온기로 채워가며, 희미해졌던 나라는 존재를 천천히 복원해 나가는 발걸음에 깊은 지지와 공감을 보내게 된다.

책의 구성은 서사적 흐름이 있다. 1부에서는 타인의 요구와 의무로만 채워진 가방의 안쪽을 응시한다. 새벽마다 교구를 만들던 손, 친정엄마의 낡은 보라색 가방, 거울 하나 없는 의사의 가방 등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묻어둔 상처를 꺼낸다. 2부에서는 가방 속 무거운 희생을 비워내고, 무엇으로 다시 채울지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신세 한탄으로 느껴지지 않고, 삶의 주도권을 다시 쥐는 성장의 과정으로 느껴진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는 나의 엄마를 보고,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일터에서 고군분투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비록 한 사람의 서사를 길게 늘어놓지는 않지만, 오히려 다양한 삶의 단면들이 모여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여성의 독박 육아나 경력 단절 같은 소재 자체는 기존 에세이에서 익숙한 주제라 신선함이 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엄마라는 이름 뒤로 밀려나 있던 나를 다시 삶의 중심에 넣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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