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안쪽 깊숙한 곳처럼 손이 닿지 않아 잊고 지내던 자리. 아이를 챙기느라 밀어 두었던 마음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 마음을 가방 앞 칸으로 옮겨 두려 한다. 가장 먼저 손이 닿는 곳에. 오래 비워 둔 자리를 조금씩 채워간다. 뒤로 밀려나 있던 내가 천천히 돌아온다(P108).
가족을 돌보고 일상을 지켜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 나의 마음을 가방 구석에 밀어 넣어 두었는지 느껴졌다. 내 경험을 돌이켜보아도 늘 아이의 필요와 일상의 의무들이 가방 앞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생각과 감정, 배우고 싶은 열망 같은 것들은 늘 뒷전이었고, 그렇게 밀려난 마음들은 가방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곤 했다. 오래 비워 둔 자리를 나만의 온기로 채워가며, 희미해졌던 나라는 존재를 천천히 복원해 나가는 발걸음에 깊은 지지와 공감을 보내게 된다.
책의 구성은 서사적 흐름이 있다. 1부에서는 타인의 요구와 의무로만 채워진 가방의 안쪽을 응시한다. 새벽마다 교구를 만들던 손, 친정엄마의 낡은 보라색 가방, 거울 하나 없는 의사의 가방 등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묻어둔 상처를 꺼낸다. 2부에서는 가방 속 무거운 희생을 비워내고, 무엇으로 다시 채울지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신세 한탄으로 느껴지지 않고, 삶의 주도권을 다시 쥐는 성장의 과정으로 느껴진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는 나의 엄마를 보고,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일터에서 고군분투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비록 한 사람의 서사를 길게 늘어놓지는 않지만, 오히려 다양한 삶의 단면들이 모여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여성의 독박 육아나 경력 단절 같은 소재 자체는 기존 에세이에서 익숙한 주제라 신선함이 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엄마라는 이름 뒤로 밀려나 있던 나를 다시 삶의 중심에 넣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