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는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 문명을 이끈 50가지 발명품으로 읽는 세계사
신무연 지음, 정기문 감수 / 다산초당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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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중의 질소로 인류의 식량난을 구원한 '기적의 기술'이, 불과 몇 년 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장의 폭탄과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변모했다면 ?


세상을 구원한 발명품이 동시에 끔찍한 파괴의 무기가 되는 뼈아픈 역사의 아이러니!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도구'들 이면에는 언제나 세상을 지배하려는 권력의 핏빛 암투가 숨어 있었다.


현직 변리사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친 <도구는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는 기원전 40만 년 전 불과 뼛조각의 발견부터 현대의 인공지능(AI)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을 이끈 50가지 발명품이 어떻게 세상의 '권력 지도'를 뒤바꾸었는지 흥미진진하게 추적한다.


💡 [이 책의 흥미로운 핵심 포인트]

⚔️ 역사를 뒤바꾼 '문명의 대역전'

1400년대만 해도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 세상을 바꿀 굵직한 발명품은 모두 동양의 차지였다. 하지만 불과 300년 뒤 상황은 완전히 뒤집힌다. 서양은 이 도구들로 바다를 건너 세계를 연결했고, 동양은 스스로 문을 걸어 잠갔다. 도구는 같았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역사의 승패를 갈랐다는 사실! 단순한 기술의 우열이 아니라 그것을 엮어내는 방식이 권력이 됨을 뼈저리게 보여준다. ⛵️🌍


🎭 발명품의 두 얼굴: 창조와 파괴

도구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 인쇄기: 종교개혁과 지식의 해방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끔찍한 '마녀사냥' 매뉴얼을 유럽 전역에 퍼뜨렸다. 🧙‍♀️

✔️ 라디오: 루스벨트는 라디오로 미국인들을 안심시키며 민주주의를 구했지만, 히틀러는 같은 기술로 광기의 파시즘을 세뇌시켰다. 📻

✔️ 쟁기: 인류에게 풍요를 주었지만, 땅을 '사유재산'으로 바꾸며 계급과 불평등을 탄생시켰다. 🌱


결국 저자가 이 40만 년의 거대한 발명사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도구 그 자체의 선악이나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누가 그 도구를 쥘 것인가?"라는 것이다.


과거의 도구는 인간의 손과 발을 대신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인공지능(AI)'은 인간의 뇌를 대신하고, 나아가 스스로 발명의 과정에 뛰어들고 있다. 저자의 섬뜩하고도 날카로운 통찰처럼, 인간이 언제까지 도구를 '쥐는 자'의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다.


매일 새로운 기술 특허가 쏟아지는 기술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변리사'의 시선으로 쓰여서인지, 과거의 역사를 읽고 있는데도 마치 다가올 미래의 경제와 권력 지도를 미리 훔쳐보는 듯한 짜릿함이 있었다.


반도체 패권 경쟁과 AI 혁명으로 요동치는 지금,

누가 기술을 쥐고 누가 그 길목을 차지할 것인가!


세상이 돌아가는 판을 읽고 다가올 미래의 부와 권력의 향방이 궁금하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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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이콘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6
이서현 지음 / 비룡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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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투표

내가 김두리라면?

1.나가 죽는다.

2.그냥 산다.


내 목숨을 두고 투표까지 벌이다니.


어느 날 교실 칠판에 적힌 끔찍한 문장. 인형 같은 외모로 톱 아역배우 자리를 지키다 하루아침에 전 국민이 다 아는 '역변의 아이콘'으로 전락한 주인공 '김두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대본도 없고 '컷'도 없는 진짜 현실에서 끝없이 추락하던 두리는 홧김에 이 자살 투표를 자신의 SNS에 찍어 올리게 되고, 대중의 반응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미친 듯이 굴러가기 시작한다.


ㄴ역변의 아이콘, 얼굴만큼 성격도 지랄 맞음.

ㄴ나 같아도 못 참음. 얼굴 좀 못생겨졌다고 죽는 게 말이 됨?


악플과 선플이 뒤섞인 댓글들, 누군가가 덧씌운 끔찍한 이미지라는 감옥에 갇혀 질식할 것 같던 두리는 '초록 심리 상담소'의 이시대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과연 두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수면 위로 드러난 과거와 함께 터진 충격적인 기사는 두리와 상담소의 운명을 어디로 끌고 갈까?


무엇보다 이 책이 선사하는 미친 몰입감은 두리의 상담 선생님, '시대'의 놀라운 반전에서 온다. 평범한 사람도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냐는 질문에 시대는 이렇게 답한다.


"그걸 내가 왜 보여 줘야 합니까? 이 나이까지 다른 사람한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면 그건 본받을 만한 게 아니라 슬픈 일이다."


와, 진짜 이 대목에서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쿨하다 못해 '미친 할망구'라는 소리까지 듣지만, 남의 시선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뭐라 하건 내 쪼대로 살겠다"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시대 캐릭터에 완전 반해버렸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시대와 대비되어, 평생 대중의 평가에 갇혀 살았던 두리의 상처는 다음 문장에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나를 좋아해 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기분이 어떤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 역시 너무 잘 알고 있다. 절실한 노력이 비웃음으로 돌아왔을 때, 한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 얼마나 끔찍하게 변질되는지도 알고 있다."


타인의 평가에 날것 그대로 내던져져 본 사람만이 아는 저 짙은 절망감.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대 선생님의 모래시계 속 모래가 저항도 못 하고 쪼르르 흘러내리면서도 결국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듯, 두리 역시 시대 선생님의 매니저가 되어가는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두려움을 뚫고 자신만의 단단한 내면을 쌓아 올린다.


이서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분명하게 말한다.

"누가 뭐라 하건, 어떤 형태건, 진짜 네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 거야."


평가가 미덕이 된 세상에서, 변명이나 설득 없이 그저 '나'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이 다정하고 위트 넘치는 위로가 참 좋았다. 지금 누군가의 시선에 갇혀 숨 막히는 기분이라면, 이 책이 흔들리는 마음을 아주 단단하게 붙잡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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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비교하고 검토하는 교열부의 쿠쥬 씨 1~2 세트 - 전2권
고이시 유카 지음, 현승희 옮김, 신쵸사 협력 / 서교책방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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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심코 넘긴 완벽한 한 페이지 뒤에는, 누군가의 치열한 '빨간펜'이 있었다. 🖍️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무라카미 하루키, 미야베 미유키 등)의 책을 출간해 온 130년 역사의 신쵸사.

이곳에는 무려 50명의 직원이 소속된 '교열부'가 있다.

만화 《비교하고 검토하는 교열부의 쿠쥬 씨》 1, 2권은 바로 이 출판계의 숨은 영웅들, 교열부 사람들의 징글징글하고도 아름다운 책 만들기 여정을 꽉 차게 담아낸 작품이다.


이 책 속 교열자들은 단순한 '오탈자 사냥꾼'이 아니다.

대문짝만한 제목이나, 절대 틀릴 리 없다고 믿는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며 스스로를 경계하고, 작가의 뛰어난 문장을 더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시대 고증과 모순까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밤잠도 설쳐가며 글자 하나, 문장 하나 허투루 보지 않고 꼼꼼하게 검증하는 그들의 감동적인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이는 책이 그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이 직접 엮어내는 다정한 물건'이라는 따뜻한 메시지를 건넨다. 우리는 흔히 교열을 글자를 고치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들은 '작가의 마음이 독자에게 무사히 전달되도록 길을 닦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저에게 책은 ‘물건’이에요. 누군가의 손에 건네질 그 물건에 뜯어진 실밥이나 덜 조여진 나사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한 교열자의 이 대목은 가슴을 쿵 치게 만든다.


세상에 나갈 단 한 권의 책을 위해 이토록 애쓰지만, 사실 냉정한 현실 속에서는

"팔리지도 않는 책 왜 그렇게 열심히 만드세요?"라는 뼈아픈 질문이 돌아오기도 한다.

요즘 누가 책을 읽는다고 그렇게 유난이냐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내 주변에도 온라인 책 친구들 말고는 책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만큼 출판계가 척박하고 어려운 실정이다. 정성을 다하고 열심히 홍보해도 팔리지 않는 책을 보며 출판 관계자들은 숱하게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감 직전까지 정성을 다해 원고를 읽고 또 읽으며 치열하게 비교하고 검토한다.


활자 덕후로서 내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읽었는데,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그리고 꽤나 미안한)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이렇게 완벽을 기하는 교열부의 노고에 깊이 감동받으며 읽고 있었는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서 오탈자를 발견해 버리고 만 것이다!


책 내용 중에 출간 후 오탈자를 발견하고 세상을 잃은 듯 괴로워하는 교열부 직원들의 생생한 묘사가 뇌리에 콱 박혀 있어서, 솔직히 이걸 리뷰에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혼자 엄청나게 고민했다. ㅠㅠ 하지만 이마저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책을 만드는 과정의 찐하고 인간적인 묘미가 아닐까 생각하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남겨본다.


누구도 크게 알아주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백 년 뒤에도 남을 한 권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출판사 사람들.

책이라는 매체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무언가에 진심을 다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푹 빠져들 수밖에 없는 웰메이드 만화다.

비록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 크게 관여하면서도 이름을 알리지 못하는 교열부지만 다음부터 책을 펼칠때 마다 그들의 노고를 다정하게 눈여겨보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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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사라진 세상 - 인공지능은 인간의 쓸모를 어떻게 위협하는가
이진우 지음 / 다산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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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니체는 일찍이 경고했다.

"기술을 통해 더 인간다워질 수 없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노예'가 될 것이다."


AI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다들 묻는다.

"내 일자리도 뺏기는 거 아냐?"

"앞으로는 주식이나 코인으로 각자도생해야 하나?"


그런데 니체 철학의 최고 권위자 이진우 교수가 쓴 신간 《일이 사라진 세상》을 읽다 보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의 방향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월급의 상실'이 아니라 '쓸모의 증발'이다.

매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는 출근길이 괴롭긴 해도, 사실 우리는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타인과 관계를 맺어왔다.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구나"를 확인받는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였던 거다.


저자는 총 3부에 걸쳐 일이 사라진 세상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자리를 치밀하게 파헤친다.


[1부] 일의 종말은 재앙인가, 해방인가: 잃어버린 '참여의 감각' 자동화는 먼 미래가 아닌 현실이다. 기술은 일자리를 통째로 없애기보다 과업을 쪼개 기계에 넘긴다. 진짜 위기는 일자리의 감소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일의 의미 구조' 자체가 붕괴된다는 데 있다.


[2부] 우리를 만든 노동, 우리를 망가뜨리는 노동: 일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인가? 한나 아렌트 등 철학자들의 통찰을 빌려 경고한다. 노동에서 해방된다고 곧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행위가 사라지면, 우리는 끝없는 소비와 오락에 중독된 채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3부] 일 없는 세상,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주체적인 감각의 상실 기본소득과 오락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없다. 일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월급이 끊기는 게 아니라,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타인과 관계 맺는 주체적 감각마저 사라짐을 의미한다.


책 속의 한 구절이 유독 뼈를 때린다.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없다’는 감각을 잊기 위해 오락이나 알코올 같은 값싼 위안 속으로 뛰어든다고 경고한다. 평소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 내게 이 문장은 훨씬 더 섬뜩하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알코올의 취기로 잠시 도피할 수조차 없다면, 무의미해진 시간과 공허함을 도대체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철학자 아렌트의 말처럼,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여가가 주어졌을 때 그걸 의미 있게 쓸 줄 모른다면 우리는 그저 끝없는 소비 충동에 갇힌 노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한창 자라고 있는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이 곧바로 뛰어들 세상이라고 생각하니, 이건 한가로운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당장 발등에 떨어진 생존 문제로 읽혔다. 이제 아이들에게 "공부해서 좋은 직장 가야지"라는 과거의 문법 대신, "일이 사라진 세상에서 너는 무엇으로 너의 가치를 증명할래?"라고 물어봐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비관이나 절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계가 노동을 대신해 준다면, 그 엄청난 자유를 온전히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데' 쓰라고 권한다.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 우리가 타인의 기준이나 조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묻고 사유할 때, 비로소 진짜 인간다운 삶이 시작된다는 메시지가 깊은 울림을 준다.


'인공지능의 아버지' 앨런 튜링은 일찍이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본격적으로 열린 AI 시대, 이제 우리는 뼈아픈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인간은 과연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가?"


무엇이든 내 머리로 사유하기보다 AI에게 먼저 찾아 묻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시대. AI가 우리의 일자리뿐만 아니라 '생각할 자리'마저 빼앗기 전에, 멈춰있던 나의 사유를 깨워줄 이 서늘하고도 매력적인 책을 꼭 한번 펼쳐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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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이 내리는 시간
브루나 단타스 로바토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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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늘 그 자리에, 똑같은 수조 안에 담겨 있었다. 마치 한순간도 떠난 적 없는 사람처럼.”


브라질 나탈을 떠나 미국 버몬트주로 유학을 온 딸. 6,500킬로미터라는 아득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모녀는 매일 밤 파란 스탠드 불빛 아래 스카이프 화면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그곳 생활은 어때?"

늘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딸은 자신이 겪는 짙은 안개, 거울 앞에서 연습하는 영어 단어의 부끄러움,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고립감을 엄마에게 전부 전하지 못한다. 그 모든 걸 다 말하려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똑같이 필요할 테니까.


딸은 새로운 언어와 풍경에 익숙해지며 조금씩 변해간다. 좋은 집에 살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점점 세련된 취향을 갖춰갈수록, 고향에 남겨둔 엄마에게 묘한 죄책감을 느낀다. 반면 엄마는 평생을 함께 살았던 딸이 떠난 텅 빈 아파트에 홀로 남아 있다. 딸의 세상이 역동적으로 넓어질 때, 엄마의 시간은 오직 매일 밤 노트북 앞, 그 좁은 '수조' 안에서 딸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에 멈춰 있는 듯하다.


소설 『푸른빛이 내리는 시간』은 낯선 세계에 적응하며 겪는 자립의 성취감과, 부모를 두고 왔다는 묘한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딸의 홀로서기를 아주 정교하게 그려낸다.


작가는 서로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번역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화면 너머로 끊임없이 서로에게 가닿으려는 애틋한 몸짓을 보여준다. 떠남과 남겨짐은 결코 단절이 아니며, 이별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나만의 집'을 짓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성장의 다른 이름이라는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책을 읽는 내내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 독립했던 때가 떠올랐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바빠서, 한때 나의 가장 큰 보호막이었던 부모님의 존재를 잠시 잊고 지냈던 시간들. 하지만 감당하기 벅찬 시련과 힘듦이 찾아왔을 땐 어김없이 엄마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정말로 잘 지내는 거지? 나랑 통화 안 할 때도?"

딸을 먼 타국으로 떠나보내고 매 순간 얼마나 걱정하고 불안해하셨을까. 소설 속 엄마의 이 말이 과거 엄마가 내게 늘 묻던 말과 꼭 같아 괜스레 울컥해진다.


물론 괜히 연락하면 속상해하실까 봐 수화기 너머로는 늘 밝고 괜찮은 척만 꾸며내곤 했지만. 이 책 속의 딸처럼 매일 밤 살갑게 일상을 나누지는 못했어도, 돌이켜보면 엄마라는 존재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수조처럼 내 삶의 가장 거대한 버팀목이었다.


"책을 덮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독자의 평이 뼈저리게 와닿는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늘 같은 자리에서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싶어지는 묘한 마력을 지닌 소설이다.


독립의 기쁨과 외로움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이와 멀리 떨어져 각자의 삶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아득하고 다정한 이야기가 닿기를 바란다. 당장 오늘 밤, 따뜻한 조명 아래서 이 책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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