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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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p.84

 

2024년 독자들이 올해의 책으로 뽑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신작 소설집

너무 늦은 시간이 세 편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결혼을 앞둔 남성 카헐과 연인 사빈사이의 감정 균열을 따라가는 이야기 <너무 늦은 시간>

언뜻 보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남자 같지만 '빌어먹을 씹년들'이라며 무의식중에 여성에 대한 경멸을 드러낸다.

그럼 너는 '이런 개나리 씹장생'이냐!!

결국 결혼을 앞둔 연인과의 사이의 균열은 남성 중심의 사고에서 침묵과 수용만 강요하며 그 바닥을 드러낸다.

 

레지던스에 머무는 여성 작가와 난데없이 찾아온 독문학 교수의 이야기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맛있게 케이크를 쳐묵쳐묵하던 독일교수는

작가라더니 케이크나 만들고 있군요라며 비난하며 뜬금없이 미친놈 날뛰듯 분노한다.

지적 권위라는 가면 아래 감춰진 우월감과 여성에 대한 조롱이 카카오100%의 케이크를 뒤집어쓴 듯 쓰디쓴 불쾌함을 준다.

 

첫 문장부터 파격적이었던 <남극>

여주인공의 욕망과 일탈, 후회의 이야기.

그 감정의 흐름은 평온한 문장에 감춰져 있지만, 놀랍도록 충동적이고 마주한 현실은 혹독한다. 결국 그 마지막은 변태적이고 절망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오히려 스릴 있고 짜릿하다고 해야 할까.

그 충동의 몫은 결국 스스로가 책임져야 함을....

 

세 편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편한 존재들이었다. 그렇다고 또 낯설지만은 않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무례함무감각의 파편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클레어 키건은 말한다. “작가는 세상을 묘사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얼마나 불편하든 간에.”

그래서 이 책은 불편하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쳐 온 사소한 장면속에 얼마나 많은 권력의 기울기가 숨겨져 있었는지를, 제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동안 따스한 인간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키건의 새로운 문장을 만난 건 또 다른 신선함이었다.

<너무 늦은 시간>으로 얼음처럼 단단하고, 잿빛처럼 차분했던 키건의 문장들.

짧은 단편임에도 날카롭게 심장에 꽂힌듯하다.

 

너무 늦기 전에 키건의 문장에 꽂혀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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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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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하며 세계 문학계에 강렬한 발자국을 남긴 김주혜 작가가 3년 만에 돌아왔다.

더욱 내밀하고, 더욱 절박한 이야기로 ......

밤새들의 도시는 발레리나 나탈리아의 고통과 비상의 궤적을 따라간다.

 

사실 발레라는 소재가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 역시 처음엔 그랬다. 정제된 예술의 세계에 어떻게 몰입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그런데 그건 기우였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타샤, 네가 날 안 좋아 한다는 사실은 나도 아는데, 그래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그런 건 아니잖아."

"너만 아니었으면......사고 날 일도 없었으니까.“

 

초반부터 휘몰아치는 궁금증.

나타샤가 겪은 그 사고는 무엇일까.

그녀가 무대를 떠난 이유는 무엇이고,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를 끝까지 분노하게 만드는 두 사람의 정체와 계속해서 그녀를 쫓는 환영은 또 무엇일까.

 

작가는 그 긴장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는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질문이 맴돌고, 책장을 놓지 못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

세 도시를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발레리나 나탈리아의 삶은 단순한 무대 뒤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을 선택한 한 인간이 견뎌야 했던 고통과 상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놓지 않았던 비상의 순간을 그린다.

 

어린 시절의 결핍, 가족과의 어긋난 감정선, 경쟁과 질투가 뒤엉킨 발레단의 삶, 그리고 다시 돌아온 도시에서 마주한 과거의 망령들.

김주혜 작가는 이 모든 내면의 층위를 정교하고도 치열하게 써 내려간다.

 

삶이란, 추락하고도 다시 날아오르는 것.”

 

예술이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시대, 김주혜 작가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은 다른 생명에게 연민을 일으킨다.

밤새들의 도시는 바로 그 연민의 문학, 존재를 지키기 위한 고통스러운 비상의 문학이다.

이 뜨거운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한때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밤새들의 도시는 이 근원적인 물음 앞에 독자를 세운다.

특히 이 소설이 던지는 윤리적 긴장과 정서적 진폭은 우리 안의 사회적 감수성과 도덕적 직관을 예민하게 건드린다.

그리고 나에 묻게 된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날아오르려는 용기를, 과연 나는 끝까지 품을 수 있을까.

 

나타샤의 삶을 지켜보며, 꼭 그렇게까지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여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때 누구보다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나의 시절이 떠올랐고,

문득 깨달았다. 그녀의 절박함이 내 과거의 열망과 다르지 않다는걸. 그래서 결국, 나는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영원한 사랑은 없고

사랑은 믿을 수 없으며

사람은 늘 실망시킨다는 것을

 

책 속 시커먼 까마귀처럼 나 또 흑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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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너는 선물이구나 - 아이의 말 속에서 피어난 성장의 순간들
임정호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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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말 한마디가
삶의 진리를 통째로 흔들어놓을 줄이야.
"나 지금 다섯 살 되고 있어?"
이 짧은 문장이 건네는 뭉클함,
스스로 커지고 있다고 믿는 그 순수한 자존감 앞에서 나도 덩달아 마음이 커진다.

『오늘도 너는 선물이구나』
이 책은 다섯 살 아이가 세상을 알아가며 던지는 질문과 문장들을 중심으로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경이롭고도 현실적인 여정을 담아낸다.

"나는 귀여우니까 봐줘"
"나쁜 사람 없어"
"지금도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고 있어"
"아빠, 하늘 나라에 가지 마“

이 책은 단순히 아이의 말 한마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언어가 자라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곧 한 가족의 세계를 어떻게 확장시켜나가는지를 섬세하게 조명한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말에 너무 익숙해졌지만,
어린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변화의 연속은 '인간은 얼마나 유연하고 단단해질 수 있는가'를 몸소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것이 나쁜 사람인데 나쁜 사람은 없다는” 아이의 말에 담긴 이중적 감정이다. 안심과 불안이 공존하는 부모의 내면은, 결국 ‘말’이라는 매개를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재정의된다. 이 책은 부모가 아이의 말 앞에서 얼마나 자주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며, 때로는 삶의 해답을 발견하게 되는지를 조용하지만 강하게 설득한다.

책을 읽다 보면, 아이의 말은 때로 시처럼 아름답고, 때로는 날것처럼 날카롭다. 그러나 바로 그런 말들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본질을 잊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다정한 언어다. 책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화 장면들은 사랑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전해지고, 또 언어가 사랑을 어떻게 확장하는지를 보여주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겐 어린 시절의 아이의 모습 그대로다.
생각해 보면 아이와 나눈 대화는 결국 내 삶의 방향을 비추는 등불이었다는 걸 이 책이 다시금 알려준 거 같다.

아침 등굣길, 졸린 눈 비비며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마음이 저릿해진다.
“이 길 끝엔 뭐가 있을까.
아이에게 더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데…”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모든 순간이 선물 같았다는 걸,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있었던 그 마음.

《오늘도 너는 선물이구나》 가 진심 어린 위로로
조용히, 다정하게 다시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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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깨기 - 원하는 것을 얻는 확실한 방법
일레인 린 헤링 지음, 황가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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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우리는 배워왔다.

“말 잘 듣고 얌전한 아이가 착한 아이야.”
“회의에서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분위기 흐리지 마.”

그래서 말을 삼켰다.

회사의 분위기, 상사의 눈치, 가정의 평화, 친구의 기분…
조용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니까.

하지만 《침묵 깨기》의 저자 일레인 린 헤링은 단호히 말한다.
그 침묵은 결국 우리를 조금씩 지워버린다고.

하버드 법학전문대학원 출신 협상전문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침묵은 금이 아닐 수도 있다.
자기 의심이 자라나고, 사고력이 둔해지고, 고통이 커지고, 존재감이 흐려진다.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무엇보다 이 책이 특히 좋았던 점은, 단순히 ‘말을 하라’고 추상적으로 말하는 대신 먼저 침묵을 이해하고 인지하도록 돕고, 우리가 어떻게 전략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그 행동 방향을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습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 "택시에서 기사님께 창문 좀 열어달라고 말해보세요."
🔸 "싫어요. 만으로도 완전한 문장이 될 수 있음을 배워요."
🔸 "조언이 아닌 공감의 말을 해달라고 말해보세요.“

이 작은 실험들이 결국 침묵의 고리를 끊는 첫걸음이 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꽤 찔렸다.
나도 '남을 침묵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지만, 은연중에 대화의 흐름을 끊고 내 의견만 강조한 적이 많았다.
반대로 말하고 싶은데 삼킨 순간도 떠올랐다.

'나 하나쯤 조용히 있으면 넘어가겠지'
하지만 결국 나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던 거다.

『침묵 깨기』는 단순한 ‘소통 기술서’가 아니다.
자기 회복에 대한 치유서이며, 사회 시스템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혹시 지금도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있다면,
혹시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입을 막고 있다면,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말할 수 없음을 배운 우리가, 다시 '내 목소리'를 찾는 방법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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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의 끝
정해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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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전화.
"엄마, 사람을 죽였어.“

그날 이후, 세상은 박희숙에게 완전히 뒤집혔다.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지독할 만큼 아들을 위해 살아온 삶.
그 모든 노력이 산산조각 난 순간.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 순 없다.’

‘그건 정말 이상한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의문사 이후 어머니를 의심하며 살아온 남자, 형사 이인우
어머니에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있다.
”아빠는 누가 죽였어?“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 수 없는 어머니
어머니를 살인자로 의심하는 아들.

두 개의 모성, 두 개의 진실이 하나의 거대한 매듭으로 얽혀가는데....

『홍학의 자리』로 소름 돋는 반전의 미학을 선보였던 정해연 작가가 이번엔 "모성"이라는 이름의 어두운 심연을 파헤친다.

조금 뻔한 듯 느슨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중반 이후부터 정해연 특유의 압도적 서사 전개가 본격 시작된다. 숨죽이며 넘기는 페이지, 곳곳에 뿌려놓은 복선, 그리고 '비정한 다정함'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이 소설의 무게를 단단히 붙잡는다.

그러나, 『홍학의 자리』에서 보여준 전율과 비교하자면, 이번 작품의 결말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모성'이라는 키워드가 과연 이렇게만 소비되어야 했을까? 끝까지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힘은 여전했지만, 마지막 한 방의 파괴력은 부족한 느낌이다.

하지만 "비정한 다정함"이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은 이 소설이 품고 있는 정서를 정확히 대변한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감정으로 여겨지는 모성이 때로는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 파국마저도 어쩌면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는 섬뜩함을 작품은 끝까지 묻는다.

"이 모든 비극은 결국 사랑이었을까.“
”과연 사랑은 어디까지 파괴적일 수 있는가“

이 불편한 질문에 나 또한 시험대에 오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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