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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묻고 의학이 답하다 - 의학의 새로운 도약을 불러온 질병 관점의 대전환과 인류의 미래 ㅣ 묻고 답하다 7
전주홍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5년 8월
평점 :
원래 해부는 의사가 아니라 이발사가 했다?!
18세기 초 해부실을 떠올려보면 충격적이다.
칼을 들고 시신을 가르는 건 의사가 아니라 신분이 낮은 이발사-외과의였고,
교수는 단상에 앉아 교과서를 낭독할 뿐, 직접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놀랍게도 이런 장면은 과학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지금도 낯설지 않다.
최근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파묘〉 속 굿 장면을 떠올려 보면,
원인 모를 병에 걸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무속의식에 매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첨단 의학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병을 신의 노여움이나 조상의 탓으로 돌리고,
무속적·비과학적 치료에 기대곤 한다.
『역사가 묻고 의학이 답하다』는 바로 이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의 역사적 전환을 추적한다. 신의 징벌에서 체액의 불균형, 장기의 손상, 분자의 결함, 그리고 정보의 오류까지—질병을 해석하는 프레임이 바뀔 때마다 의학은 새로운 도약을 거듭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인류가 질병을 바라본 방식을 다섯 가지 관점으로 풀어내며,
사회, 문화, 예술과 과학기술의 변화 속에서 의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 방대한 역사를 흥미롭게 전해준다.
첫째, 신의 노여움
고대 사회에서 질병은 신의 징벌이자 공동체 전체에 내린 재앙으로 여겨졌다. 굿이나 제의 같은 비과학적 치료에 의존했지만, 동시에 환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정서적 접근을 남겼다.
둘째, 체액설
네 가지 체액이 균형을 잃으면 병이 생긴다고 믿었다. 잘못된 이론이었지만, “질병에는 자연적 원인이 있다”라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 관점이 수백 년간 이어지며 사혈 같은 오류도 낳았다.
셋째, 해부학적 관점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인체 탐구와 인쇄술의 발달은 몸속 장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지식을 공유하게 했다.
“증상은 고통받는 장기의 비명이다”라는 말처럼, 질병은 특정 장기의 손상으로 이해되었고 근대 의학의 문이 열렸다.
넷째, 분자 관점
현미경과 측정 기술은 질병을 세포와 분자 수준에서 파악하도록 이끌었다.
‘마법의 탄환’이라 불린 항생제, PCR, 표적항암제 같은 혁신적 치료법이 여기서 탄생했다.
다섯째, 오늘날의 정보 관점
유전자는 암호로, 질병은 정보의 오류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개인의 유전체와 환경, 생활습관을 고려한 정밀의학은 맞춤 치료를 가능하게 했고,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며 미래 의료를 바꾸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의료 불평등, 돌봄의 본질, 윤리적 갈등 같은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읽는 동안 특히 흥미로웠던 지점은,
의학의 거대한 도약이 의외의 영역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더 정교하게 인체를 그리려는 열망이 해부학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대목은, 의학과 예술이 긴밀히 얽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쓰는 ‘다혈질’이나 ‘우울질’ 같은 기질 개념이 사실 고대의 체액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학의 발전은 위대한 업적의 나열이 아니라,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뀔 때마다 이루어진 도약의 기록이었다.
《역사가 묻고 의학이 답하다》는 그 역사를 따라가며,
의학을 고정된 지식이 아닌 끊임없이 갱신되는 관점의 진화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에게 질문을 남긴다.
질병 극복에 도전해온 인류는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