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항상 구체적인 사실에 직면합니다.
알라딘에서 이처럼 전례 없이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이 판이 작고, 구체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모든 전쟁이 슬프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내전이 슬픈 것은 가해자도, 희생자도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항상 구체적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그는 항상 구체적 해답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지식인이란 말에 혐오증세가 좀 있습니다. 가끔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이면 해갈될 갈증도 장강의 물을 끌어다 그 갈증을 해소시켜 주겠노라며 실천은 과부족하면서도 이론만으로 세상을 다 아는 듯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제 아무리 뛰어난 지식인이라도 총체적인 모양을 그릴 수 있을 만큼 단순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과거 제갈량이 살았던 시대나 괴테, 단테가 살았던 시대에 비해 지금의 지식인들이 대단한 위세를 누릴 수 없음은 그 때문이지요.
농경시대를 살았던 허생이 10년을 공부하겠다며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는 변화 속도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지식인들이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쉼 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학진 체제에 사로잡혀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논문만 써대는 지식인에게 구체적 현장의 이야기는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 가장 필요한 지식인의 모습은 구체적 사실에 대한 고민을 우선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학문을 쌓는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일 겁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공격받는 이유는 이들의 공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과거 80년대의 실천적 지식인들이 직접 현장에서 맞닥뜨렸던 치열한 고민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창백한 얼굴로 어린아이 다그치듯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백하건데 저의 사업체에 한명의 외국인 노동자분이 계십니다. 삼 년 전쯤 들어오신 분인데 부끄럽게도 전 이분의 월급을 다른 분들의 형평성과 어긋나게 크진 않지만 십 만 원 정도의 차등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 자신도 부끄럽다는 생각에 어제 그분과의 상담 후 보수를 다시 조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전 돌아오는 길에 내 맘속에 어느덧 자리하고 있었던 차별과 비겁함, 그리고 떳떳하지 못함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직면해야만 했던 건 그 외국인 노동자와는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그 나머지 직원들의 항의였습니다. 지금 자신들의 보수에는 불만이 없으나 그와는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호봉과 직책과는 다른 그 무엇의 다른 조건을 바라는 그분들의 집단 항의에 오늘 낮 두 시간 정도를 전 시달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이처럼 구체적인 보편으로서의 하나의 사건 앞에 서게 됩니다. 구체적 보편들의 연쇄 앞에서 과연 우리는 구체적 해답(대답)을 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 반문하게 됩니다. 과연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속에 들어있는 모순들을 직시하고자 애쓰고 있는 사람인가? 내가 억울한 순간, 누군가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운동방식으로 볼 때 불매는 잘못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 시민불복종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시민사회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은 역풍에 휘말렸습니다. 대안 없는 네거티브 운동이 지닌 한계를 지적받은 것이었지요. 마찬가지로 <조중동>불매운동과 <조중동>광고 불매운동 역시 결과적으로 <조선일보>의 판매 부수와 열독률을 배가시켜주었으며 또 <조중동>광고 불매운동은 결과적으로 <한겨레>, <경향> 등 상대적으로 진보적 매체들의 광고 수주마저 어렵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현상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반대운동이 지닌 정치적 함의들까지 비판 맞아 마땅한 것이냐고 한다면 저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선덕여왕>에서 미실과 덕만 사이에 나누는 대화 장면들은 비록 현란한 칼싸움 같은 액션신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했습니다. 그것은 치밀한 논리 대결이 펼쳐졌기 때문이지요. 그 중 한 장면에서 미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백성은 진실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희망은 버거워하고요.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입니다. 백성은 떼를 쓰는 아기와도 같지요.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그러자 덕만이 대꾸합니다.
"진흥대제 이후로 신라가 발전이 없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세주님(미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주께서 나라의 주인이었다면 늘 더 잘 되길 바랐겠죠. 허나 주인이 아니시니 남의 아기를 돌보는 것 같이 늘 야단치고 늘 통제하고, 주인이 아닌 사람이 어찌 나라를 위한 꿈을 꾸겠습니까. 꿈이 없는 자는 절대 영웅이 되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자의 시대는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합니다."라고 맞받아칩니다.
만약 덕만의 반박이 없었다면 우리는 미실의 말만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옳다고 수긍하였을 겁니다. 지식인이 필요한 까닭은 현상만을 추수하여 그것만이 모든 상황의 원인인 듯 정리하는 데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일이라면 신문기사를 스크랩하여 적절하게 재조합해낼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죠.
낙천낙선운동의 역풍을 통해 시민사회진영, 진보진영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대안세력의 정치화 없이는 우리 정치의 미래를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었죠. 그 까닭은 대안정치를 내세우며 정치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사람들이 버티지 못하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정당에 흡수되는 결과를 빚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 없이 미래로 나가는 정치는 없습니다. 지금의 실패는 우리가 지불해야 할 수업료가 더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의 노력이나 낙천낙선운동이 무의미했거나 반대로 진보를 위한 해악이라고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선일보> 불매운동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일등신문을 자임하며 독립운동했던 신문으로, 민주화에 동참했던 신문으로 시시때때로 정체성을 숨기며 독자대중을 속여 왔던 <조선일보>의 맨 얼굴을 드러나게 해준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조선일보>를 선호하는 일부 대중의 집중도를 높여준 결과를 빚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과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선택한 사람들의 몫이지 그것을 비판한 이들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되었기 때문에 친북인명사전이 만들어지는 결과를 빚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동(動)이 있으면 반드시 반동(反動)도 따르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조중동>광고 불매운동 역시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광우병 위험성이 높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재개한다는 MB정부의 정책을 옹호하고, 촛불시위를 비판하는 신문에 대해 국민들이 나서 이들 신문기업들을 압박하고, 이들 신문에 대해 광고하는 기업들에 불매한다는 선언을 한 것이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의 전말입니다.
게다가 <한겨레>, <경향>, <MBC> 등의 광고 수주가 어려웠던 진정한 이유를 외면하고, 이것을 누구처럼 광고 불매운동의 여파라고 말한다면 그건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의 근저에 문제가 있거나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한겨레>, <경향>, <MBC>의 광고 수주가 어려웠던 진짜 원인은 <불매운동>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이 바뀌면서 이들 진보 매체에 대한 ‘정부 광고’를 눈에 띌 만큼 편향적으로 줄여버린 정부 탓이라는 것은 전문가나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아는 문제입니다. 이런 사실은 <미디어오늘> 같은 매체전문비평지들이 이미 수차례나 확인시켜준 것들입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이렇게 편향된 광고를 부추겼고,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기업들이 진보매체에 광고 발주를 꺼린 것이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한겨레>나 <경향>에 광고를 실은 기업의 홍보담당자들은 정부 모기관원의 안부 전화를 받아야만 하는 분위기 속에 이들 진보매체에 광고를 발주하는 기업들이 나오기 쉬웠겠습니까? 이런 뒤처진 정치와 경제구조의 문제들을 도외시한 채 마치 ‘광고 불매운동’이 <한겨레>, <경향>의 광고 수주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면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현상을 마치 원인인 양 지적하는 꼴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지적일까요.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지적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불매운동 방식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싸움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무엇을 할 것 보다는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모든 운동을 부정하거나 비판할 마음은 없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의 파업 행위의 정당성 또한 모두 부정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입니다. 여하튼 앞서 언급한 점만 보더라도 '불매'는 지켜보는 이들보다 선언 당사자들을 더 크게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를 가지고 있기에 그 방법에 있어 과격성을 지적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굳이 이런 방식이 아니어도 알라딘의 불법행위, 비정규직 고용관행에 대해 항의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방식을 젖혀두고 ‘불매’라는 운동하는 본인들 자신을 소극적이고, 불편하게 만들어버리는 방식만으로 규정해버린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불매운동을 향한 여러 불만과 비판에는 이 또한 과정이며 또 다른 깨우침을 위한 수업료를 지불했다 생각하고 또 다른 방법과 다양성을 모색하며 알 수 없는 미래를 찾아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었다라고 생각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알라딘 사장님!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알라딘에서 불매를 외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론 이곳에 그래도 더 많은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 당신이 알라딘이란 기업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꿈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란 것 당신도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불매란 방식이 과격하고, 이를 통해 알라딘이 큰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저 역시 미안한 마음이 있으며, 또 평소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나 임금 문제 등에 대해 신경써왔다는 당신의 이야기도 그 나름의 입장에서는 진실일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또 이미 많이 알려진 것처럼 알라딘을 비롯한 우리 인터넷 서점들의 관행에도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알라딘만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관행과 새로운 미래를 위해 알라딘이란 인터넷 책방의 주인이신 당신이 좀 더 나은 선택과 대안을 우리 앞에 선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듣기로 여의도 증권가의 애널리스트들은 이런 인터넷 서점이 앞으로 지금보다 두 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답니다. 물론 법적으로 비정규직 사용이 불법도 아니고, 도서정가제, 택배비 등 기존의 서점들과 경쟁하기 위해 인터넷 서점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경쟁력이 약화될 측면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거 도서정가제 문제처럼 이번 문제에 대해 인터넷 서점들의 공동 대응이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지금 같은 택배체제는 결국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서점이자 동시에 IT 선도 기업으로서 알라딘이 보여주었던 지금까지의 선진적인 방식과 아이디어들을 총동원해 지금의 이런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노동관행을 남들보다 조금 앞서 개선해줄 용의와 의지를 보여주실 수는 없는지 마지막으로 기대해 봅니다.
이제 새해 1월이 됐습니다.
그나저나 저도 바람구두님이 이곳을 떠나니 저도 떠나야 하는거 아닌가 봅니다.
원래 빠돌이 빠순이 들은 주인님 가시는대로 따라다니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근데 이젠 그분이 어디서 또아리를 트시려나....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