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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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한 번도 글쓰기가 쉬웠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 글을 읽는 것에 비해 글 쓰는 것은 참 어려웠다. 나만 읽고 보는 일기를 제외하고 독후감, 숙제, 과제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편지를 쓰는 것까지 글쓰기 앞에 고민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글은 대학에 입학할 때 '논술 시험'을 준비했을 때였다. 그때는 이 시험만 끝나면 글쓰기의 어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입 논술'은 글쓰기 세계의 서막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 대학생활 내내 리포트 걱정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과목마다, 교수님마다 다른 방법으로 글을 썼지만, 쓰면 쓸수록 자신감보다 요령만 점점 늘어났다. 리포트라는 험준한 벽을 넘고 나니, 요즘엔 "자기소개서"의 세계 앞에 서있다. 나와 같이 느끼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인지, 중고등학생을 위한 논술학원, 대학교에선 글쓰기 수업, 사설 학원에서 자기소개서를 봐준다고 한다. 10년도 넘게 글쓰기를 해왔음에도 글쓰기 앞에서 막막해진다.

 

왜 이렇게 글쓰기가 어려운 것일까?

 

그냥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참 어렵다. 좋은 글은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된 글이다. 좋은 글은 마음에 와닿는 글이다. 좋은 글은 논리가 탄탄한 글이다. 좋은 글은 하나의 선율처럼 읽히는 글이다. 좋은 글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들도 많고,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잘 알지만, 막상 글쓰기 앞에만 서면 자신이 없어진다. 그럴 땐 글 잘 쓰는 사람에게 한 수 배우는 게 필요하다. 좋은 글이란 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으니, 글쓰기 스타일마다 스승을 두면 더없이 완벽하다.

 

"이 책은 18세기를 중심으로 멀게는 14세기부터 가깝게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비롯해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장가 혹은 작가들이 선보인 글쓰기의 미학과 방법을 교차 비교해 살펴보면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박지원, 이덕무, 니체, 나쓰메 소세키, 박제가, 괴테, 볼테르, 조너선 스위프트, 심노승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시대를 넘나드는 글쓰기 천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 바로, 『글쓰기 동서대전』에서.  글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빠지지 않는 것이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글쓰기 실력을 키워주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동서대전』은 다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책이다. 동서양의 지식인의 글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글 속에 숨은 의미를 저자 나름대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이끌어낸다. 막상 그 결과물을 책에서 확인해보면, 뻔한 내용이라며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글쓰기 천재들은 말한다. 글쓰기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쓰는 것이고 그 글을 쓰기 위해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좋은 글쓰기 자체는 나올 수 없다고 말이다.

 

이탁오는 동심이란 곧 진심이라고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말과 글은
이미 순수함과 진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짓일 뿐이다.


『글쓰기 동서대전』은 총 9개 주제마다 동양과 서양의 지식인 4명을 선정해 주제를 관통하는 글쓰기 철학을 풀어내고 있다. 36명의 동서양 지식인들의 글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저자는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각각의 주제에 부합하는 저서에서 글쓰기를 하는 와중에 마주했던 고민까지 유추해낸다. 이 책에는 논술을 잘하는 비법, 리포트를 잘 쓸 수 있는 방법, 뽑히는 자기소개서와 같은 비결은 없다. 오히려 글쓰기의 기술적인 면모보다,  글쓰기의 미학을 다루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간직한 글쓰기, 정치적 사회적 목적의 글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글쓰기, 나를 탐구해나가는 글쓰기, 정치적 신념을 표현한 글쓰기 등. 각 글마다 동서양 지식인들은 비슷한 듯, 다른 자신의 글쓰기 결과물이다. 이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 두고, 저자는 이 글들과 동시대에 비슷한 글에서 주제 의식을 찾아낸다.

 

예를 들어  "17~18세기에 만약 극도로 압축적인 묘사와 함축적인 표현 속에 자신의 감성과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담았던 '하이쿠'라는 시의 미학이 일본에 있었다면, 조선에는 극도로 간략한 묘사와 절제된 표현 속에 자신의 감성과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담았던 '소품문'이라는 산문의 미학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라는 말처럼.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 풍미했던 소품문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하 구체적인 예시와 저자의 깊은 분석을 통해 집어준다. 그 외에도 풍자 문학에 있어서 조선의 '박지원',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영국의 '조나선 스위프트'의 글을 통해 풍자 문학이 왜 그 시대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가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이중적인 시대, 곧  '위선의 시대'"라는  사실을 함께 말한다.

 

대작과 걸작은 그러한 담대한 정신과 거대한 열정이 있어야
비로소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니체는 더 이상 진리를 '인식'하는 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글쓰기 동서대전』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자의식의 글쓰기' 부분이었다. 자의식의 글쓰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외에 낯선 이름들이었기에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 '나'란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사유가 녹아진 글들을 읽는 과정이 어려워서 더 기억에 남았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난 뒤에 적은 글들은 꼼꼼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었고, 천천히 생각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삶과 그 순간순간의 궤적을 스스로 돌아보고 기록하는 자서전은 특별하다. 일기나, 평전과 달리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인식의 변화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서전은 다른 사람은 결코 쓸 수 없는 내용을 담을 수 있지만 동시에 왜곡될 여지가 많다. 이에 대해 "'진실성'과 '진정성'이야말로 '글은 나의 삶이자 나 자신'이라는 자의식의 미학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가치다. 만약 이 두 가지가 빠져 있다면 그러한 글은 자기 포장이자 자기 홍보 일 뿐이다."라는 당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진실로 나의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들어놓은 것은 두려움이나 고통도 아니었고, 쾌락과 오락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나는 자유를 쟁취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그리고 누구로부터 자유를 찾는다는 것인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는 거칠고 불친절한 자유의 오르막길에 천천히 올라갔다.


36명의 지식인들의 글이 모두 좋은 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작가의 글은 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어떤 작가의 글은 읽어도 읽어도 어렵기만 했다. 『글쓰기 동서대전』을 통해 36명의 작가를 읽고 나서도 여전히 난 글쓰기가 어렵다. 36명의 비결 아닌 비결을, 그들의 글쓰기 통찰력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글쓰기 동서대전』을 통해서 배운 건 글쓰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모든 글이 어려웠다. 특히 시대가 급격하게 바뀌는 시대에 글을 쓴다는 건 쉽지만 동시에 쉬울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윤동주 시인의 시가 쉽게 쓰일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36명의 글과 그 글들이 만들어졌던 시대상을 함께 배우며 18세기 이후로 전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였고 글도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글이 태어나는 건 어떤 천재의 선구안과 같은 판단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대에 필요한 글을 용기 있게 쓴 지식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9개의 글의 갈래의 중심에는 시대의 변화가 놓여 있었고, 글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글쓰기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우리 시대에도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글쓰기 동서대전』 속 36명의 동서양 지식인을 만난 건 잘한 선택이었다. 홍길주의 글에서 배울 수 있듯이 "글쓰기에서 자득의 묘리란 다양한 길과 방법을 통해 찾을 수 있고 또한 구할 수 있다." 36명 모두에게 혹은 몇 명에게 혹은 책이 아닌 다른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나만의 좋은 글'을 위해선 결국 다독, 다상량, 다작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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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그림 엽서북 : 옐로우 에디션 -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해 그려보는 손그림 엽서북
공혜진 지음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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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 상상해 그린다.
그린다는 동사는 머릿속 상상을 나타내는 말이지, 내 손에서 그리려는 걸 나타내는 말이 아닌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고등학교 2학년 미술 시간 이후로 그림을 그린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림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민망한 낙서를 한 적은 많지만. 왠지 그림이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진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기보다, 어떻게 그리세요.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그리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손그림 엽서북》이라니. 도전이었다. 나에게 《손그림 엽서북》은 말이다. 하지만 막상 한두 개 그리고 나니 생각보다 쉬웠다. 나를 위한 그림이라, 나를 잘 아는 내가 그린 손그림 엽서를 뜻깊게 받아줄 상대를 생각하니 말이다.

 

 

 

 

캘리그래피나 그림 그리는 책과 친하지 않은 나에게 그림 그리기 좋은 펜과 종이에 대한 정보는 꽤 유용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참 오랜만에 큰 문구점에 가서 펜 앞에서 이것저것 써보았다. 이 펜 저 펜 써보며 내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을 느끼며 고른 펜은 결국 네임펜이었다. 익숙하기도 했고 얇은 펜과 보통 굵기의 펜이 합쳐진 형태가 신기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손그림 엽서북》의 저자가 "적당한 굵기라서 어떤 그림을 그리기에 적당하다"라는 말이 나의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책을 펼친 여러분과 마음껏 끄적이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편안함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루 중 한 시간이라도 '손그림 그리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작가의 따뜻한 당부에 처음으로 책장을 열고 펜을 꺼냈다. 혼자만의 시간을 끄적이며 보내길 권하는 그 마음 뒤에는 작게 보이는 그림 그리기가 우리 마음에 주는 위로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림 그리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난 손 엽서 그리는 과정이 엽서를 쓰는 과정과 닮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엽서도 쓸 때 그 사람만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오로지 하나의 일에만 몰두하는 순간. 시시콜콜 잡생각은 멀리 달아나며 느낄 수 있는 편안함. 이 편안함을 《손그림 엽서북》의 작가이자 그림 가이드 공혜진씨가 추구했던 바가 아닐까.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펜을 손에 쥐는데 자꾸만 힘이 들어가서. 결국 제대로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책을 덮었다. 자꾸 옆에 있는 그림에 시선이 가서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 그려볼까 싶었지만,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나의 첫 손그림 엽서 도전은 '유보' 되었다. 만약에 성공을 거두었다면 아드만 편지지와 나의 아드만 손그림 엽서가 함께 봉투에 담겨 소중한 사람의 우편함에 들어갔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나의 첫 손그림 엽서

 

 

 

첫 손그림 엽서다. 결국 첫 '작품'은 나에게 주기로 했지만. 막상 그려보니 별거 아니었다. 산타 할아버지를 그릴까 하다가 결국 책 읽는 두더지로 바뀌었지만. 그리고 나니 자꾸만 애착이 갔다.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나만의 손그림 엽서가 태어난 거다. 진짜 처음으로 도전했을 때와 달리, 그냥 수염을 그렸고 그러고 나니 꽤 그럴싸한 그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펜을 들고 엽서에 툭하고 점을 하나 찍고, 선을 하나 그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무언가 완성되어가는 게 신기했다. 새하얀 백지가 아니라 이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작은 소재가 중간에 놓여 있어서  그런지 더 자신감 있게 그림을 그렸다. 따라 그려볼까 생각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책 읽는 두더지 그림이 완성되었다.

 

 

 

 

책을 좋아하는 난, 책이 머리에 떠올라 책을 그렸다.
그런데...
뭔가 바쁜 두더지보다 책 읽는 두더지의 등이 더 곧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삐뚤삐뚤한 점 하나, 선 하나로 누구도 따라 그릴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어요.
마음 가는 대로 즐겁게 그려보세요!

 

저자의 말은 진짜다. 내 그림은 누구도 따라 그릴 수 없기보다 누구도 따라 그리지 않을 그림이지만. 나만의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즐거움은 크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크기는 경험해본 사람만 안다. 다음에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는 내 손그림 엽서를 함께 보내주어야겠다. 다음엔 좀 더 나만의 개성이 가득 담긴 엽서가 완성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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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좋은 일 - 책에서 배우는 삶의 기술
정혜윤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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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책은 무엇일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때로는 명쾌한 듯 답을 내리지만, 마음 한구석에 답에 대한 찜찜한 감정이 남아 있다. 어떤 답을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책마다 나에게 주는 의미가 달랐고, 내가 받은 감동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이라는 복수에 대한 정의는 어떤 책들을 소외시키는 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어떤 때 소외시킨 줄도 몰랐던 책이 내 마음을 울리는 책이 되는 경험을 자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꽤 자주 만들어준 나의 책 가이드 중 한 명이 바로, 정혜윤 피디였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던 책에 의지하곤 한대

 

이런 말과 함께 친구에게 소담한 위로를,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 책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무나 할 수 있는 말 같아 보이지만, 자신의 경험이 없다면 혹은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하기 힘든 말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책이 가진 힘을 믿고, 좋은 책이 사람에게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아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세상에 무수히 많은 책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책에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새로운 지식이 담겨 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 몇 세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책은 사람에게 ‘책’이라는 이름 이상의 의미로 함께 해왔다. 대화. 선물. 만남. 친구. 취미. 진실. 성찰. 교훈. 영혼... 수많은 단어로 많은 사람들이 정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인간은 비탄, 슬픔, 고통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뭔가 - 비탄, 슬픔, 고통을 다른 일로 바꾸는 일, 이를테면 시 또는 한편의 글 - 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 것을 알려준다.
*
좋은 책은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장차 내 생각이 될 것을 찾아내고 다른 것을 느끼도록 자극하고 다른 일을 해보도록 격려한다.
*
좋은 책과 만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서러운 마음도 자아도 사라지고 ‘이건 진짜다, 진짜 멋지다’라는 마음과 가벼운 한숨, 벅찬 가슴만 남는다.


『뜻밖의 좋은 일』은 유명한 북 칼럼니스트이자 개성 있는 에세이스트인 CBS 정혜윤 피디의 책에서 배운 삶의 기술이 응축된 북에세이입니다. 많은 책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숨은 명저에 사람들의 손길과 눈길이 가도록 만든 그녀는 이번에 책과 삶을 이어 글을 썼다. 이번 글에도 책과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이번 책 속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사는 맛”이 무엇인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나’라는 존재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자아”를 거쳐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을 이해한 뒤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이야기로 『뜻밖의 좋은 일』의 여정은 끝이 난다. 각 장에 담긴 이야기는 분절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삶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흐름 속에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완성해나간다. 그러므로 책을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개인적으로 한 흐름으로 책을 읽어나가길 추천한다.

 

삶의 본질은 사소한 사건들에서 더 잘 드러나고,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이 특별한 이유, 어느 평범한 날이 빛나는 날로 바뀌는 것, 진실한 마음으로 사소하게라도 뭔가를 변화시켜서이다.

 

『뜻밖의 좋은 일』을 읽다가 건너뛰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쉼표를 찍기도 하고. 때론, 중간에 마침표나 느낌표, 물음표를 찍기도 하며 읽었다. 정혜윤 피디의 경험과 방대한 독서가 만난 삶의 기술을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이해하기엔 나의 앎의 영역은 그녀와 달랐기 때문이다. 무심결 툭툭 나오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고 때로는 마음을 파고드는 감동을 주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엘레나 피란테, 가즈오 이시구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작가를 알고 있었다. 이 작가들이 만든 세계이자 이야기를 읽었다. 하지만 이들의 세계에서 내가 발견한 보석과 다른 정혜윤 피디의 보석은 다른 빛을 내고 있었다. 각 작가들의 이야기에서 삶의 기술은 정혜윤 피디의 글 속에서 이야기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글은 현실을 붙잡고 있으나, 관통하는 메시지의 중심은 소설로 삶에서 마주할만한 일들에 어느 정도 답을 주는 이야기가 많다. 뚜렷한 답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지만, 그 답으로 향하는 실마리를 주는 듯했다. 마치 소설이 넌지시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길 권면하는 것처럼 정혜윤 피디는 그 화법으로 삶의 기술을 알려준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은밀한 꿈이 있다. 이렇게 지상의 아름다운 양식들에 나를 연결시키는 최고로 럭셔리하고 부유한, 한마디로 끝내주는 축제의 공간 속에서 새로운 나를 창조하고 다른 누구와 비교할 것 없이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말리라는 꿈이다.

 

그 삶의 기술 중심에 놓인 감정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난 망설임 없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따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글 속에는 삶에 대한 사랑, 주변에 대한 사랑, 나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을 사랑하였고, 자신이 사랑하는 책 속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담긴 시선에서 삶을 읽어낼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많은 책을 읽었고,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그 책들과 일상을 연결하기 쉬웠던 것이 아니다. 정혜윤 피디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뜻밖의 좋은 일』은 혼자 보다 함께인 이야기가 많다. 누군가와 동행하다, 누군가와 함께 맞서다, 누군가와 함께 맞이하다 얻게 된 것들이 책과 절묘하게 녹아져 있다.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를 꿈꾸는 정혜윤 피디만의 아름다운 생각, 사랑이 『뜻밖의 좋은 일』에 담겨 있다.

 

우리의 시간 속에, 영원의 흔적이 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여행 중이다.

 

믿고 읽는 정혜윤 pd, 나에게 정혜윤 pd의 책 앞에 붙는 수식어가 바로 “믿고 본다”다. 『뜻밖의 좋은 일』에도 어김없이 이 수식어를 붙일 수 있어 좋았다. 책 읽는 시간이 참 좋았다.

 

“책 속에서 지혜와 삶의 해법을 찾는 독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항상 독자인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의 고독을 떠올리고, 당신의 아까운 시간이 이 책으로 낭비되지 않기를 바라고, 당신의 삶 또한 낭비되지 않기를 바라고, 혼자서 책을 읽는 당신에게 말할 필요도 없이 기쁜 뜻밖의 좋은 일이 생기길 바란다.”

 

저자의 독자를 향한 마음처럼, 혹은 바람이 깃든 책이 바로, <뜻밖의 좋은 일>이다. 정말 뜻밖의 좋은 책을 만났고 그래서 읽음이 나에게 좋은 일이었다. “좋은 책은 그 글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세상이 달라 보이게 한다."라는 말을 바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한 좋은 책들 가운데 몇 권을 나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으니, 이 책은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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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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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살기 위해서 적정 체온을 유지해야 한다. 36.5도. 인체는 놀랍게도 항상성을 유지한다. 단지 신체만 그런 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도 똑같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외부 환경 그리고 내부 환경에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건 중요하다. 물론, 마음의 정온 상태를 지향하는 사람의 경우에만. 마음이 정온 상태가 아닌 변온 상태인 사람도 있다. 마음의 상태가, 생각의 온도가 오르내리는 사람이 말이다. 나는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의 작가 홍승희씨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모든 관계가 n개의 몸처럼 n개의 다양성이다.
우리만의 분류를 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
너와 나는 친구나 연인 사이’ 말고,
‘너와 나는 바나나, 참외 사이’처럼.
각자의 몸과 색깔만큼이나
관계의 방식도, 이름도 무한하다.

 

그녀의 삶은 정온 상태로 마음을 유지하기 보다, 다채로운 온도를 오가는 변온 상태를 추구해온 듯싶다. 몇 줄 짜리 글로 정리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의 자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자취를 곱씹기보다 그녀의 생각에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글들이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에 담겨 있다.

 


해석되는 존재는 늘 해석당하고,
해석하는 위치에 서 있는 기존의 언어는
늘 말하지 못하는 존재를 해석한다.

 


생각들은 정말 독특하다. 아니, 신기하다. 그래서 제목처럼 '이상하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이유도 짐작이 간다.  성의 경계를 허무는 주장, 권력의 경계를 비집고 들어가는 발언,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 자살을 대하는 방식은 '보통'이나 '일반적인', '다수의'라는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이다. 그녀는 '폴리아모리'라는 무질서한 관계를 지향하며 공동 사랑(?)을 추구하는 관계론을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구속될 수 없고, 누군가를 구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문장으로 그녀의 생각을 전해 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툭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하나의 문장이 아닌 한 편의 글로 읽으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나와 다를 뿐, 틀린 생각이 아니라는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녀가 글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주길, 공감해주길 바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글에는 이해할 수 있는 설득의 근거가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그녀의 생각이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틀렸다고 부정할만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다르다는 인정을 이끌어낸다.

 

너와 나는 당연하게도 다르고,
매일매밀 달라지는 별과 햇빛의 농도처럼
너는 어제 알던 내가 아니다.
기준을 잡고 싶어서 공부하다 보면 기준이 사라져버리고,
기준을 붙잡으려던 나까지 사라져버리게 되는
서늘한 순간을 선물 받는다.

나라는 장벽이 무너지고 타자의 얼굴이 보인다.
텅 빈 공간이라서 신비다.

 

책을 읽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녀만 생각하는 것일까. 이 자유로운 사유는 그녀만이 향유할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자유로운 사유는 익숙한 '옳음'이라는 틀에 갇혀, 그 틀의 존재 여부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을 선물한다. "왜"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은 채, 남들이 쫓는 행복을 당연한 듯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다른 방향을 걸어가는 그녀의 움직임은 시선을 이끌어낸다. 물론 그녀를 불쌍하다는 듯이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저자는 "가엾은 타인을 염려하는 건 자기효능감을 느끼면서 건강한 자아로 살아간다고 믿기 편리한 방식이다. 도덕주의자들은 그 낙으로 생의 허무를 견딘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아닌 눈총에도 지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간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구태여 자살을 감행할 필요도 없다"고 쓴
벤야민의 흔적을 더듬는다.
애초에 생과 세상에 무엇을 기대했던
열정 과잉이 문제였을지 모른다.

자살을 감행하려는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 것은
내게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끔찍한 디스토피아도 없고
찬란한 유토피아도 없이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하게' 이어지는 오늘이다.
열정에 간간이 불을 지피면서 물을 건넌다.

 

하지만 그녀가 늘 괜찮은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을 했지만 그 선언 뒤에 따라오는 눈총을 감내하는 건 쉽지 않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죽이는 행위이기에 선택한 삶이지만 저자의 삶을 둘러싼 주변은 그녀를 그대로 놓지 않는다. 여자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충고 아닌 충고, 서울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꿈꿔야 하는 것들, 갖추어야 하는 조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양배추를 삶아 먹는 그녀에게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쉽게 붙이고 그녀의 삶을 해체하고 해석한다. 그 해석 앞에서 항상 '나다움'을 내세운다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때로 자신은 틀린 것은 아닐까 싶은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삶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자신의 삶이 틀렸다고 낙인찍고, 부정당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 원동력이 궁금했다. 나라면 버티지 못했을 모든 것에 지지 않는 그녀의 자유로움의 원천이 궁금했다.

편견에 동의하면서 나를 걱정하는 말에 대꾸해줄 수 없는 이유다.


편견과 낙인은 부수라고 있는 거다.
내 등에 스티커가 붙었다면
스티커의 허술함을 폭로할 기회가 생긴 것이기도 하다.
낙인찍힌 존재가 아무렇지도 않은 오늘을 살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흥얼거리는 소리는
그 자체로 균열이지 않을까.


그 힘에는 적지만 확실한 홍승희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일 것이다. 그녀의 삶을 지지해주고, 그녀의 행보에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만 마무리 짓는다면 무언가 아쉽다. 나라는 개인이 오로지 존재하기 위해 설사 존중하는 역할로 주변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글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홍승희씨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며 그 의지를 표출하는 데서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이나 유화 작품, 거리에서 완성한 수많은 예술 작품이 그녀의 삶을 지지해주는 힘이란 생각이 든다. 나를 표현하고 표출하며, 나의 자유로움을 표현할 때 그녀는 무언가를 얻는 것 같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속 글은 어두워 보이지만, 그 안에 자유로움이 깃들어 있는 듯 내가 느낀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특별함과 이상함의 경계에 서서 글을 썼기에 밝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자유로움은 단순히 그녀 내면의 생각을 그대로 쓴 결과물이 아니라, 자유로움이 함께 글을 썼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롤랑바트르의 저자의 죽음처럼. 언어가 글을 쓰듯, 자유가 그녀의 글 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언어로 소통하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착각은 폭력을 휘두를 근거가 된다.
내가 무엇을, 누군가를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권태와 오만, 혐오. 모른다는 걸 알기에 환대할 수 있다.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환대를 느끼는 이유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를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마음대로 해석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읽는다고 읽는 것이 아니고. 생각한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 책을 덮기도 전에 강하게 한 방 맞은 듯싶다. 지금까지 쓴 리뷰를 다시 재고해봐야 하나 고민이 된다.
'당신은 이 글을 읽지 못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언어를 뛰어넘으니까.'
편지 마지막에 꼭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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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 - 단 한 번뿐인 오늘을 살고 있는 당신에게
아오야마 슌도 지음, 정혜주 옮김 / 샘터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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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은 꽃을 피워내는 중요한 재료입니다.
진흙이 없으면 꽃은 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흙은 꽃이 아니지요."

 

 

 

"바티칸을 비롯하여 로마인들은 동시대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역사의 눈은 두려워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심판을 내릴지 두려워하고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려고 하지요."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음과 교훈을 전하는 데에는. 짧고 간결한 글이라도 그 안의 메시지가 분명하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전해진다.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깊이 있는 참선 끝에 얻은 교훈이라서 그런 지도 모른다. 


스님이 쓰신 책이라 불교에 관한 메시지가 많이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종교로 한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넘나들며 인생을 꿰뚫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의 메시지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분명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마음을 울리는 사례와 함께 있어 더 좋았다.

 

과거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미래를 여는 것도 닫는 것도, 지금 현재의 삶에 달려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석가탄신일에 맞추어 읽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석가탄신일을 넘기고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를 읽었다. 불교도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듯. 석가탄신일에는 나도 모르게 스님들의 지혜가 남긴 메시지를 찾아보게 된다. 수행과 참선 끝에 얻은 삶의 지혜를 오로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날에 읽으면 그 깨끗한 메시지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넘기고 읽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조금 불량한) 가부좌 자세로 천천히 읽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당연하다. 모두가 다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 가치들이 빛을 내며 사회를 일구어 가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신문을 보면 과연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양한지 잘 모르겠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예를 들면 돈과 같은 것을 맹신하게 된 것 같다. 물질만능주의 사회라는 말에 단호하게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별로 없다.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이것만이 사회의 기준이 되는 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수많은 석학들과 많은 사람들은 비물질적인 가치들을 발굴해낸 책들을 쓰고 읽는다. 인생을 살아가며 좀처럼 놓치기 쉬운 것들이기 때문에 계속 글과 말로 이 가치를 확인해야 하는 것 같다. 반복적으로 계속 말이다.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 이 책은 우리 삶에 필요한 지혜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책이다.

 

'내가 고통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진흙은, 안테나를 세우라는 부처님의 자비가 보내 준 선물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안테나를 세우지 않으면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고,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가르침도 구할 수 없으니까요. 좋은 스승, 좋은 가르침이라는 인연에 이끌림으로써 비료로 바꾸고 한 송이, 한 송이 꽃을 피워가길 바랍니다.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는 인생이 아름답게 꽃피우는지를 알려준다. 만약 우리 인생이 한 송이의 꽃이라면 어떻게 꽃을 피워야 할까.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지나쳐와야 할 과정이 있다. 매서운 겨울의 추위도 견뎌야 하고, 차가운 바람에도 지지 않아야 하고, 세찬 빗줄기에도 꿋꿋이 버텨야 한다. 집안에서 키우는 꽃도 마찬가지다. 난이 꽃을 피우는 시기도 가장 메마르고 고통스러운 때에 이를 때 꽃을 피운다. 저자는 연꽃에 비유한다. 맑은 연못이 아닌 진흙 위에서 깨끗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우리의 인생에 시련과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인생이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온실처럼 따뜻하고 안락한 환경과 같이 인생이 평온하면 좋겠지만,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험난하다. 그 인생을 견뎌야 하는 지혜를 아름다운 연꽃에 비유한 것처럼 인생에 도움이 되는 귀한 이야기들이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에 담겨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옳은가, 입장이 바뀌면 옳고 그름이 바뀐다는 것은 참 진실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신의 이름 아래 부르짖는다 해도 말이지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 진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아오야마 슌도의 한 편 한 편의 글에 담긴 이야기에 내 마음에 미소가 번지기도 했고, 따끔함에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뒤흔들리는 정도가 작았다. 한마디로 잔잔한 감동이 많은 책이었다. 마음을 오르내리게 하는 강렬함이 남다른 책이 있지만, 참선과 득도가 고요함 속에 얻을 수 있듯이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도 그런 것 같다. 마음에 와닿는 메시지에 밑줄 치며 읽었다. 다 긋고 나니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는 여행'이라고 해도 좋을 일면이 있습니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할까, 선별하는 눈의 깊이와 높이로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인생은 행복과 불행이 계속 교차한다. 어느 하나의 감정만 따라오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건,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행복한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아 보인다. 물론 사람이 어떤 마음 자세로 인생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인생을 완벽하게 사는 건 불가능하지만, 인생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방법은 존재한다.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는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온전한 행복을 좇기보다 행복을 선별하는 안목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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