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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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살기 위해서 적정 체온을 유지해야 한다. 36.5도. 인체는 놀랍게도 항상성을 유지한다. 단지 신체만 그런 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도 똑같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외부 환경 그리고 내부 환경에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건 중요하다. 물론, 마음의 정온 상태를 지향하는 사람의 경우에만. 마음이 정온 상태가 아닌 변온 상태인 사람도 있다. 마음의 상태가, 생각의 온도가 오르내리는 사람이 말이다. 나는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의 작가 홍승희씨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모든 관계가 n개의 몸처럼 n개의 다양성이다.
우리만의 분류를 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
너와 나는 친구나 연인 사이’ 말고,
‘너와 나는 바나나, 참외 사이’처럼.
각자의 몸과 색깔만큼이나
관계의 방식도, 이름도 무한하다.

 

그녀의 삶은 정온 상태로 마음을 유지하기 보다, 다채로운 온도를 오가는 변온 상태를 추구해온 듯싶다. 몇 줄 짜리 글로 정리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의 자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자취를 곱씹기보다 그녀의 생각에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글들이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에 담겨 있다.

 


해석되는 존재는 늘 해석당하고,
해석하는 위치에 서 있는 기존의 언어는
늘 말하지 못하는 존재를 해석한다.

 


생각들은 정말 독특하다. 아니, 신기하다. 그래서 제목처럼 '이상하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이유도 짐작이 간다.  성의 경계를 허무는 주장, 권력의 경계를 비집고 들어가는 발언,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 자살을 대하는 방식은 '보통'이나 '일반적인', '다수의'라는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이다. 그녀는 '폴리아모리'라는 무질서한 관계를 지향하며 공동 사랑(?)을 추구하는 관계론을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구속될 수 없고, 누군가를 구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문장으로 그녀의 생각을 전해 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툭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하나의 문장이 아닌 한 편의 글로 읽으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나와 다를 뿐, 틀린 생각이 아니라는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녀가 글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주길, 공감해주길 바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글에는 이해할 수 있는 설득의 근거가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그녀의 생각이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틀렸다고 부정할만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다르다는 인정을 이끌어낸다.

 

너와 나는 당연하게도 다르고,
매일매밀 달라지는 별과 햇빛의 농도처럼
너는 어제 알던 내가 아니다.
기준을 잡고 싶어서 공부하다 보면 기준이 사라져버리고,
기준을 붙잡으려던 나까지 사라져버리게 되는
서늘한 순간을 선물 받는다.

나라는 장벽이 무너지고 타자의 얼굴이 보인다.
텅 빈 공간이라서 신비다.

 

책을 읽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녀만 생각하는 것일까. 이 자유로운 사유는 그녀만이 향유할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자유로운 사유는 익숙한 '옳음'이라는 틀에 갇혀, 그 틀의 존재 여부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을 선물한다. "왜"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은 채, 남들이 쫓는 행복을 당연한 듯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다른 방향을 걸어가는 그녀의 움직임은 시선을 이끌어낸다. 물론 그녀를 불쌍하다는 듯이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저자는 "가엾은 타인을 염려하는 건 자기효능감을 느끼면서 건강한 자아로 살아간다고 믿기 편리한 방식이다. 도덕주의자들은 그 낙으로 생의 허무를 견딘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아닌 눈총에도 지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간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구태여 자살을 감행할 필요도 없다"고 쓴
벤야민의 흔적을 더듬는다.
애초에 생과 세상에 무엇을 기대했던
열정 과잉이 문제였을지 모른다.

자살을 감행하려는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 것은
내게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끔찍한 디스토피아도 없고
찬란한 유토피아도 없이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하게' 이어지는 오늘이다.
열정에 간간이 불을 지피면서 물을 건넌다.

 

하지만 그녀가 늘 괜찮은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을 했지만 그 선언 뒤에 따라오는 눈총을 감내하는 건 쉽지 않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죽이는 행위이기에 선택한 삶이지만 저자의 삶을 둘러싼 주변은 그녀를 그대로 놓지 않는다. 여자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충고 아닌 충고, 서울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꿈꿔야 하는 것들, 갖추어야 하는 조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양배추를 삶아 먹는 그녀에게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쉽게 붙이고 그녀의 삶을 해체하고 해석한다. 그 해석 앞에서 항상 '나다움'을 내세운다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때로 자신은 틀린 것은 아닐까 싶은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삶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자신의 삶이 틀렸다고 낙인찍고, 부정당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 원동력이 궁금했다. 나라면 버티지 못했을 모든 것에 지지 않는 그녀의 자유로움의 원천이 궁금했다.

편견에 동의하면서 나를 걱정하는 말에 대꾸해줄 수 없는 이유다.


편견과 낙인은 부수라고 있는 거다.
내 등에 스티커가 붙었다면
스티커의 허술함을 폭로할 기회가 생긴 것이기도 하다.
낙인찍힌 존재가 아무렇지도 않은 오늘을 살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흥얼거리는 소리는
그 자체로 균열이지 않을까.


그 힘에는 적지만 확실한 홍승희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일 것이다. 그녀의 삶을 지지해주고, 그녀의 행보에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만 마무리 짓는다면 무언가 아쉽다. 나라는 개인이 오로지 존재하기 위해 설사 존중하는 역할로 주변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글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홍승희씨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며 그 의지를 표출하는 데서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이나 유화 작품, 거리에서 완성한 수많은 예술 작품이 그녀의 삶을 지지해주는 힘이란 생각이 든다. 나를 표현하고 표출하며, 나의 자유로움을 표현할 때 그녀는 무언가를 얻는 것 같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속 글은 어두워 보이지만, 그 안에 자유로움이 깃들어 있는 듯 내가 느낀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특별함과 이상함의 경계에 서서 글을 썼기에 밝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자유로움은 단순히 그녀 내면의 생각을 그대로 쓴 결과물이 아니라, 자유로움이 함께 글을 썼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롤랑바트르의 저자의 죽음처럼. 언어가 글을 쓰듯, 자유가 그녀의 글 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언어로 소통하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착각은 폭력을 휘두를 근거가 된다.
내가 무엇을, 누군가를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권태와 오만, 혐오. 모른다는 걸 알기에 환대할 수 있다.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환대를 느끼는 이유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를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마음대로 해석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읽는다고 읽는 것이 아니고. 생각한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 책을 덮기도 전에 강하게 한 방 맞은 듯싶다. 지금까지 쓴 리뷰를 다시 재고해봐야 하나 고민이 된다.
'당신은 이 글을 읽지 못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언어를 뛰어넘으니까.'
편지 마지막에 꼭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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