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우리시대의 논리 27
조정진 지음 / 후마니타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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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모르는 슬픈 단어가 세상엔 참 많았다. 책 제목에 들어간 단어도 그런 단어였다. 《임계장 이야기》.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준말이라고 한다. 단어를 볼 때는 몰랐던 단어의 뜻을 알게 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싶었다. 그 느낌이 이 책을 사게끔, 읽어보게끔 하였다. 우리 사회의 어둑어둑한 그림자를 텍스트로 비추는 글이었다. 한 사람의 삶의 고백이 한 사회의 어둠을 드러내는 글은 읽기 망설여지게 하지만, 언제나 읽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부른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이 책에서 내가 전한 체험의 기록은 이번 논의에도 참여할 길 없는 수많은 경비원의 절박한 외침이다. 이 작은 목소리에 잠시라도 귀 기울여 주기를 소망한다. _ 254쪽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가 고학력에 소위 좋은 직장에 다녔기 때문에 이 고단한 삶을 기록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삶을 글로 확인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던 세상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각오하며 읽었던 것인데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설마. 이런 일이 있었다고?'라고 생각했던 일들 투성이였다. 그늘진 얼굴은 세월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현실을 읽고서야 알았다.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순간을 많이 주었다. 가장 마음이 쓰였던 이야기는 꽃잎도 치워야 하는 쓰레기라서 꽃봉오리가 올라온 어느 봄날 새벽에 봉오리부터 털어낼 수밖에 없는 경비원 이야기, 가정 형편 때문에 디자인 공부가 아닌 간호학을 선택한 아이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삼켜야 했던 이야기들이었다. 고단한 삶과 달리 일이 고되어 마음조차 얄팍해진 것이 보여 더 마음이 쓰라린 이야기였다.

어디부터 어떻게 잘 못된 건지. 그래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하면 될지. 그 생각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난, 그냥 생각 속에서 길을 잃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생하세요." 고작 나의 말과 미소 띤 인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서. 누군가를 애도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는 일이라서.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만든 그 상황의 원인을 개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중요한 걸 이번에는 부디 꼭 붙잡았으면 좋겠다. 그 붙잡는 손에 내 마음도 함께 얹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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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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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이 살았던 공간을 직접 찾아가 작품이 탄생했던 세계를 탐험하고, 그 세계와 작가를 새롭게 조망한다'는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는 클래식 클라우드. 《클림트》를 읽었다. 《클림트》와 《모네》를 두고 고민했다. '모네' 그림을 조금 더 좋아하지만, 그림보다 작가 한 개인을 더 들여다본다면 클림트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클림트》를 읽었다.

말하자면 그는 먼 과거와 먼 나라들에서 영감의 물줄기를 얻기 위한 우물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얻어낸 물줄기는 클림트의 손을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완연히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창조되었다. 클림트의 놀라운 천재성은 바로 이 부분에 있었다. _ 148쪽

<키스> <유디트> <아델레 블로흐 - 바우어의 초상> <다나에> 등 그가 그린 황금빛을 머금은 작품이 좋았다. 그런데 왜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다행인 건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이유를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클림트의 작품이니까요. 그것이면 이유가 충분한 듯싶었다. 사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가지고 싶었고, 이 책 덕분에 그 이유를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비잔틴 왕국의 황금 벽화나 그리스정교회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그림과 비슷한 불균형 그리고 화려한 그림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만드는 아우라가 좋았다. 그건 산비탈레 성당 방문과 글래스고를 대표하는 매킨토시, 일본 그림이 클림트 안에서 융합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기존 작품과 다른 작품을 시도하기까지 과정이 《클림트》에 잘 정리되어 있다. <구 브루크 극장 객석>이나 부르크 극장 천장에 그린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빈 미술사 박물관 벽화에 그린 베아트리체 그림에서 점점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빈 분리파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그의 삶은 새로움, 다름을 찾고 또 찾는 과정이었다. 작품도 연인도.

클림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인간은 예술, 그리고 사랑의 힘을 통해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마저도 이길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 벽화를 제작하던 당시의 클림트는 꼭 40세였다. 더는 젊지 않은, 그리고 자신의 나이에 대해 무게감을 느낄 시기다. 그는 서서히 다가오는 몰락과 소멸에 대한 공포를 감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합쳐져서 예술의 영원한 승리를 찬양하는 <베토벤 프리즈>를 제작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_ 111쪽

18,800원이란 가격이 부담스럽지만. 그런데도 계속해서 모으고 싶고, 읽고 싶은 시리즈가 클래식 클라우드다. 헤르만 헤세, 빈센트 반 고흐가 얼른 출간되었으면 좋겠고. 칼 세이건과 다윈도 나왔으면 좋겠다. 계획이 있을지 모르지만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 오스틴까지. 내가 읽고 싶은 시리즈가 추가되길 바라며. 《카뮈》를 '언젠가 읽을 책장'에서 '조만간 읽을 책장'으로 옮겨 두었다.

그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바쳐서 해야만 하는 일을 가진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클림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었다. _ 240쪽

나를 바쳐서 읽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읽고 싶은 책과 나왔으면 하는 책을 기대하는 나도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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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문장 쓰는 법 - 못 쓰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땅콩문고
김정선 지음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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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글쓰기가 어려워 고민이다. 좋은 글쓰기가 아니라 그냥 글쓰기조차 어렵다. 자기소개서나 대입 논술 외에 글쓰기가 어려웠던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올해부터 글쓰기가 어렵다. 고민을 덜 수 있을까 싶어, 문장수리공 김정선 작가의 신작 《열 문장 쓰는 법》을 읽었다. 이런, 고민이 더 깊어졌다.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싶을 때,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대부분 '나만의 것'과 '모두의 언어'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 때문일 겁니다. 그 거리가 모든 '나만의 것'을 어지럽게 만드니까요. _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중에..

처음 책을 보았을 때, 놀랐다. 생각보다 예상보다 책이 더 얇았기 때문이다. 얇다는 건 책의 분량도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랬다, 155쪽. 금방 독파할 수 있는 글의 양이었다. 이 한 권을 읽는데 10일도 넘게 걸렸다. 그 이유는 내 글이 왜 엉망인지 너무 아프게, 몹시 정확하게 찌르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글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예전에 내가 썼던 글보다 지금의 글이 더 부족해 보였다. 내가 지금 담고 싶은 이야기가 글을 쓰면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밀려난 이야기는 내 안에만 쌓였고 중요한 것이 빠진 글은 나에겐 공허해 보였다.

내 안에 갇힌 채로 '나만의 것'만 재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글쓰기의 목적이라면 굳이 머리를 쥐어뜯어 가며 글을 쓸 이유가 있을까요? 글쓰기를 통해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의 나를 발견하고 창조해 가는 작업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글쓰기는 이른바 '가성비'는 물론 '가심비'도 엉망인 작업일 겁니다. _ <내겐 너무나 낯선 나를 만나다> 중에..

내가 쓴 모든 글이 공허한 건 아니다. 내 감정에 충실한 글, 가령 편지를 쓸 때면 '나만의 것'을 오직 너에게만 맞추면 되기에. 글쓰기가 힘들지 않다. 오히려 금방 도톰해진 편지봉투를 씨익 웃으며 보는 여유까지 부린다. 하지만 다른 목적이 더해지는 순간,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다.

내가 쓴 글이 마음에 차지 않고, 수시로 글쓰기가 어렵고 힘들지만 계속 쓰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서" 쓴다. 이렇게 쓰면,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설명하지 못한 내 마음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열 문장 쓰는 법》은 글쓰기가 어려운 내 고민을 나보다 더 정확하게 짚어낸 책이다. 해결 방법도 함께 고민해 주었다.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는 나에게 "행운을 빕니다!"라는 시니컬한 응원까지. 아무래도,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의 언어'로 오롯이 번역하기 위한 일, 멈추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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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가르쳐준 것들 - 자유롭고 유쾌한 삶을 위한 17가지 과학적 태도
이정모 지음 / 바틀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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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관장님의 글은 재미있다. 재미있는데 유익하기까지 하다. 어렸을 때 나는 과학을 좋아했다. 과학의 달을 기다렸다. 고무동력기 만드는 데 재능을 발견한 뒤로, 교육청 대회까지 준비했었다. 과학의 달, 과학의 날이 수업 대신 (매년 반복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가 떨어지는) 과학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과학은 늘 신기했고, 내가 모르는 세계를 열어주는 창이었다. 안타깝게도 주기율표와 화학식과 함께 과학과 결별을 고했지만. 이정모 관장님의 글을 읽을 때면, 과학이 다시 재미있어진다. 물론 여전히 어렵지만.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은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에서 과학과 친해지길 권하던 털보 관장님이 과학적 태도 취해보기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물론,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과학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세상에서 발견하는 이야기가 다르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달랐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그 다름을 만든 요소 17개를 설명한 책이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17가지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좋은 걸 알지만 놓치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틀려도 괜찮고, 달라도 괜찮으니 다시 한 번 더 해볼 수 있는 용기, 한 번 더 해볼 때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달라진 것을 발견하는 섬세한 관찰력, 낯선 것을 밀어내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열린 마음, 그런데도 나의 중심과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잊지 않는 것, 느낌이 아닌 숫자를 믿으며 검증에 검증을 반복하는 것, 내가 하는 연구가 우리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향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세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내가 틀릴 수가 있음을 항상 인정하는 자세까지.

저는 과학을 공부하면 인간은 더욱 겸손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스웨덴의 보건학자이자 통계학자인 한스 로슬링은 겸손은 자신의 지식과 본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모른다고 말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것,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기존의 의견을 기꺼이 바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겸손이 바로 과학적 사고가 만들어주는 자세입니다. 과학 지식은 계속 쌓이고 변하기에 훌륭한 과학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아울러 새로운 사실을 접하면 기존의 연구방법에 과감한 변화를 시도합니다. 이처럼 과학자와 같은 사고를 내재한다면 인간은 조금 더 겸손하게 세상과 사물, 그리고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_ <겸손;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것> 중에..

과학자의 태도, 쉬운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태도가 아닐까. 겸손이란 태도가 난 가장 좋았다. <알쓸신잡> 시리즈를 볼 때 나왔던 과학자분들이 한 번씩 이야기했던 태도인데, 이 책에서도 이 태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이유는 나에게 가장 없는 태도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과학을 행복하기 위해서 배운다고 했는데, 시험 부담 없이 잘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과학 이야기를 읽으니 정말 좋다. 집콕도 길어지는데, 5년 만에 고무동력기를 만들어봐야겠다 싶어 가격을 알아보았는데. 아,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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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인 타임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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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다룬 책을 읽은 이유는 기억해야만 하는 어느 봄날을 위해서였다. 이언 매큐언의 《차일드 인 타임》은 딸을 잃은 한 남자가 나온다. 눈앞에서 자신보다 더 소중하다 생각한 딸을 잃어버린다. 상실.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이 마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이언 매큐언은 오늘이 지나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시간의 흐름을 놓친, 순간순간 기억이 '현재', '오늘'로 수렴하는 한 남자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갑자기 그들의 슬픔은 개별적이고 배타적이고 소통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걸었다. _40쪽

딸 케이트를 잃고 스티븐과 줄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실이 짓누르는 삶을 살아낸다. "상실의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길로 들어섰다. 함께 나눌 것이 없었다."라는 말처럼. 이겨낼 수 없는 슬픔의 중심에 파고드는 것과 슬픔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것. 참 다른 방법으로 말이다. 딸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살아있을 것이란 희망은 살아있게 하였지만, 사는 것이 아닌 삶이었다. 그 생각은 스티븐의 현재를 다른 순간으로 보냈고 지금이 아닌 그때가 그에겐 지금이 되었다.

숨을 멎는 듯한 극한의 슬픔과 더불어 사는 삶은 차가웠다. 차가운 아픔을 파고드는 건 행복한 기억이었다. 소설의 초반, 아이를 잃기 직전의 기억이 인상적이었다. 스티븐이 얼마나 곱씹고 복기했는지 그 기억은 세밀하고 정교한 그림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흐름에 씻겨져 내려갈까 봐, 자꾸만 지금의 좌표에 놓았던 첫 기억이 줄리와 케이트와 보낸 평범했던 어느 아침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시간은 케이트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잃어버렸을 기억이었다.

사람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쩌면 자신도 자식을 낳고 나서야, 부모에게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완전하고 복잡다단한 삶이 있었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_86쪽

작가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아버지를 잃었을 때, 줄리와 케이트랑 함께했던 순간들. 그의 기억이 부른 수많은 '지금'을 읽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이언 매큐언의 문장이 만든 기억이 생생해서 자연스러웠을 뿐이었다. 읽다가 나도 몇 번이나 그와 함께 이야기의 흐름을 놓쳤다. 그러고 나서야 알았다. 시작과 끝이 의미 없는 소설이란 걸. 자녀를 잃은 부모의 삶이란 흐르는 시간에 자신을 맡기는 것조차 버거운 것이란 걸. 케이트를 잃은 후, 소설 속 모든 순간은 '현재'이지만 무의미하단 걸.

갈 곳이 없다는 것, 몸이 있는 형태로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의 도착을 기대하는 이는 없으며, 목적지나 시간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 격렬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그는 꼼짝하지 못한 채로 고정된 한 점을 빙빙 돌고 있었으니까. 이런 생각과 함께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이 쏟아져 나왔다. _111쪽

그리고 나서야, 나는 스티븐이 소설의 끝에 도착한 기억이 얼마나 기쁘며 아픈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소설이었고, 읽고 난 후에도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나의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여운을 주기 때문이다. 《속죄》, 《체실비치에서》에 이어서. 이 작품에서도 상실, 상처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굴절될 수 있는지 그는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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