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일주일
메이브 빈치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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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치키 스타는, 지극히 소박한 곳이지만 자신의 의견으로는 아주 평화로운 치유의 장소라고 말했다. 그녀 자신도 뉴욕에서 일할 때 해마다 그리고 돌아와 휴가를 보냈다고. 걷고 또 걸으며 넓은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러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가면 항상 뭐든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손님도 그런 느낌을 받기 바란다고 말했다.

 

마음에 몽글몽글 온기가 사르르 퍼지는 느낌.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온몸을 간질거리는 느낌.

 

《그 겨울의 일주일》을 읽고 난 뒤 내게 남긴 여운이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깊숙이 행복해지는 책을 만났다. 이렇게 책을 읽어본 게 얼마 만인지. 좋은 책을 만났다는 강한 확신이 드는 책이었다. "온갖 사연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치유 공간 호텔 스톤하우스, 이곳의 다음 손님은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타이틀이 과장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는 깊이 고민하며 읽어야 하는 책도 아니었고, 휘리릭 읽는 가벼운 책도 아니었다. 문장은 슥슥 쉽게 읽히고, 마음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리는 소설이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는 티저 북으로 처음 만났다. 3명의 인물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감동을 받지 못했다. 다시 차분히 치기, 리거, 올라의 이야기를 읽고 일주일간 스톤하우스에 머문 손님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지금과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고로, 혹시 티저 북을 읽고 2% 아쉬움을 느낀 분이 있으시다면, 《그 겨울의 일주일》을 완독하길 강력 추천한다. 나 역시 티저 북을 읽었을 때, 감동을 받기 보다 호기심이 생긴 독자 중 한 명이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이 소설을 읽고 이토록 행복할까?


《그 겨울의 일주일》의 무엇이 날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한 권의 책을 읽고 좋았던 이유를 적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 받은 감정에 충실하게 그 이유를 적어보려 한다.


옮긴이는 메이브 빈치의 유작인 《그 겨울의 일주일》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유작이 된 이 소설은, 그래선지 그녀가 지금껏 살면서 경험한 모든 일과 그녀가 만나온 모든 사람과 그 순간순간의 모든 비밀이 압축된 하나의 집약체라 해도 될 듯하다. 그녀의 눈길이 가닿은 자리마다 한 포기 풀이 자라고 한 송이 꽃이 피어날 것처럼 그녀는 모든 만남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한 장면이나 인물을 스케치하고 디테일을 넣어 만들어낸 풍경이 하나둘 모여 더 큰 풍경, 점점 더 큰 풍경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인간 존재라는 큰 풍겨, 세상살이라는 큰 풍경에서 한 조각 한 조각 떼어내면 그녀가 그래는 장면 하나하나, 인물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부각되어 나타날 것이다."
_ 옮긴이의 말 중에 《그 겨울의 일주일》 464쪽


정연희 선생님은 그림처럼 이 소설을 묘사했다. 원어로, 이를 다시 한국어로 읽어서일까. 참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난 메이브 빈치가 《그 겨울의 일주일》의 인물들을 그린 종이가 셀로판지가 아닐까 싶었다. 나에게 《그 겨울의 일주일》은 사물과 빛을 투과하는 투명한 색비닐지에 메이브 빈치가 그린 그림 같았다.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을 하얀 도화지에 대해 세밀하게 그려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그린 것이 아니라 셀로판지에 네임펜으로 투박한 선으로 그리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은 섬세하게 그린 느낌. 그래서 그 그림은 한 장 한 장 살펴보았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림과 겹쳐서 볼 때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치키, 리거, 올라 세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위니에서 프리다까지)의 이야기로 옮겨질 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각 장의 서두는 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가기도 하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훔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망설이다가, 여행 일정이 어그러져서,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유는 달랐고, 삶의 모습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스톤하우스에 있었다. 12명의 '지금' 그리고 앞으로 1주일 정도의 시간은 스톤하우스에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각 인물은 자신의 셀로판지 속 주인공이었지만, 때론 다른 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배경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건네는 조언가가 되기도 했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그 겨울의 일주일》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었다.
어떤 한 인물 때문에 좋았던 게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가 모였을 때, 《그 겨울의 일주일》을 다 읽었을 때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왜인지 생각해보았다. 그건,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겹쳐져 따뜻한 빛을 비추는 순간에 마음에 온기가 탁 들어와서, 그래서였다. 마치 셀로판지 한 장 한 장에 손전등을 비추었을 때 다른 색 빛을 내지만 모두를 겹쳤을 때 하얀 빛을 내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가 모였을 때 새하얀 빛이 마음을 비춘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 빛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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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겨울의 일주일》의 주인공을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치키'가 아닐까. 모든 인물을 스톤하우스로 모여들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오가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으니까 말이다. 치키의 마음이 단단해지는 걸 가장 먼저 읽어서일까. 그녀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 배경으로, 조언해주는 사람으로, 침묵으로... 다양한 관계에서 그녀만의 존재감을 드러낼 때면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마치 오랜 시간 언덕을 지켜온 '스톤하우스'와 그 바다를 보고 치키가 느낀 편안함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그런 편안함이 느껴졌다.


"설명해야겠지요. 아버지는 늘 분명하고 정중했으니까 저도 그렇게 할 거예요. 아버지의 꿈에 대해서는 어떤 비난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그 꿈이 제 꿈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려고요."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넘쳤다.
치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치키는 많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상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이 주는 위로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꿈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성공이라고 믿고 싶은 것과 진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한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던 안데르스에게 그녀는 몇 마디를 해주었다. 그리고 안데르스 스스로 행복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한 뒤, 그의 결정에 끄덕임으로 지지를 표했다.
빙긋 짓는 미소 한 번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작은 행동이 주는 감동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그 능력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요. 미래에 대해 뭐든 모호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세요. 사람들이 별점에서 기대하는 것도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 능력도 길이 들어서 해롭지 않게 될 거예요. 제가 지금 보기로는, 그런 환시 때문에 죄의식에 빠져 계신 것 같아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려고 해보셔야 해요. 사람들한테 생각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것도 그냥 생각이에요. 그뿐이에요."


때로는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한 사람의 고민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마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 정말 태산처럼 커다란 고민이었는데. 그 사람 앞에만 가면, 별거 아닌 작은 게 되는 신기한 경험.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의 크기를 줄여주는 사람. 치키는 프리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프리다 역시, 리키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작게 만들어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그 간단한 마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했다.)


모두 잘 될 것이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 다 읽고 나면 모두가 잘 될 것 같은 이야기였다. 마음이 따뜻해져서 힘을 얻는 느낌이다. (비슷한 소설을 찾아보자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지만.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훌쩍 지난 1월의 혹은 2월의 어느 일주일 동안 읽어도 행복해질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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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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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포틀랜드), 그냥 좋은 그곳에 대하여

 

예전에 일본의 작은 소도시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동안 일본 도시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책, 사진을 통해 봤지만, 내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우리 동네에서도 볼 수 있는 한적함이었다. 고요하기도 하고 간간히 사람들의 시선에는 여행자인 나를 향한 낯섦이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서 별거 아는 일상 속 모습을 찍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일본 소도시를 찾아간 나에게 몇몇 친구들은 이렇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관광하러 가는 곳에 안가고 왜 그리로 가느냐."고 말이다. 그때 난 "그냥, 좋잖아"라는 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들은 눈치였지만 이내 내가 선물하는 작은 기념품에 시선을 돌리는 친구를 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소도시에서 끝내 발견한 것은 익숙함이었지만, 처음부터 익숙함이 눈에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 찾은 도시의 첫인상은 언제나 저마다 모양과 색깔이 달랐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면 그 도시에서의 삶도 떠나온 곳에서의 삶과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론 반가웠고, 다른 한편으론 아쉬웠다." 난 장기 여행이 아니어서 이와 같지 않지만, 도시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그 도시만의 독특한 점을 발견하는 것도 다 좋았다. 서문에 적혀있던 저 문장을 보고서 난 퐅랜만의 독특한 일상 그리고 특별함을 기대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다니 그 도시의 익숙함이 보였다.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아닐까. 어쩌면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일지 모른다.


비내리는 곳, 파월 북스가 있는 곳, 세인트 존스 다리에서 볼 수 있는 불꽃놀이,타투와 문신한 사람들이 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곳, 마리화나 연기 속을 조깅하는 사람들. 한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 포틀랜드에는 있다. 이우일씨의 표현처럼 "이곳 사람들이 유별나다". 처음에 낯선 모습들이 보인다. 그 낯섦이 지금의 포틀랜드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살펴보고 이우일씨의 생각을 확인하다 보면, 그곳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란 사실이 선명히 보인다. 이우일씨만의 생각은 화려한 수식이나 묘사가 없는 대신 단백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가본적없는) 포틀랜드와 닮아 있어 보인다. 어느 새 자신의 또다른 집이 된 포틀랜드에 대한 만화가 이우일의 글에는 포틀랜드 일상 속에 그가 얻은 소소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중간중간에 있는 삽화는 피식 웃게 하기도 하고, 그 곳의 풍경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나는 작고 아담한 이 도시가 좋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크기가 안정감을 준다. 퐅랜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도시이고, 그래서 살아보니 정이 간다. 나와 도시를 조화시킬 수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와 우연히 만난다는 건, 행운이다. 자신의 삶의 크기와 속도와 들어맞는 도시에서 산다는 건 축복이다. 이우일씨에게 포틀랜드는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물론 행운과 축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일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동이 옅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퐅랜의 특별함이 익숙함으로 바뀌어도 싫지 않다. 아마도 그 마지막에 대해 이우일씨는 명쾌한 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
끝이 있으니 우린 즐기며 살 수 있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나는 여기서 내가 일본 소도시에서 발견했던 일상을 발견한 이유를 찾았다. "그냥."이라는 한마디가 아닌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를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가서 발견한 일상이 싫지 않고 그냥 좋았다는 말 대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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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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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너머에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이 질문에서 시작된 세상 어디에도 없는(Nowhere)에 대한 여정이 펼쳐진다. 에레혼(Erehwon)이라는 미지의 땅에 대한 이야기 《에레혼》에 펼쳐져 있다.

영국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세우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명성을 떨쳤던,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어느 식민지 (추론하자면, 뉴질랜드)의 양치기 소년의 모험담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가 든 생각은 에레혼이라는 어떤 지역 혹은 나라에 대한 참여 관찰지(민족지) 같았다. 문화인류학이 학문적 분과로 태동했을 무렵과 맞물려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마치 한 사람이 에레혼에 대해 관찰한 것과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느낌이 들었다.

모험 소설, 《에레혼》

영국은 판타지 소설과 모험 소설이 유명하다. 어느 서점에 가도 판타지 코너와 모험 소설 코너에 한가득 책이 꽂혀 있다. 판타지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 톨킨, 나니아 연대기의 C. S 루이스, 해리 포터의 조앤. K. 롤링이 있고, 모험 소설에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나라는 다르지만 걸리버 여행기의 조너선 스위프트 등이 있다. 《에레혼》은 제목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어디에도 없는 (nowhere) 판타지와 같은 나라에 대한 모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어느 식민지에 있는 한 남자는 양떼가 풀을 먹는 초원 너머의 산맥을 바라본다. 그 산맥에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궁금해하면 서 말이다. 그리고 그곳을 가보는 것, 그곳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는 것이 그에겐 이루고 싶은 목표가 된다. 아무도 가지 않았고, 어떤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는 산맥 너머를 향해 걸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가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러기만 한다면 내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승리이건만. 아직은 이런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양치기 소년은 자신이 볼 수 있는 시선 너머의 그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양치기로써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달리 자신을 벅차게 만드는 그곳에 대한 동경 끝에 그는 모험을 시작한다.

 

사실 이토록 대단한 목표를 눈앞에 두고도 목숨이 아까워 고개를 돌린다면 대체 목숨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에레혼에 가는 길은 마치 유토피아에게 가는 듯하다. "협곡의 한쪽 면이 어스름한 저녁 그림자에 푸른빛을 띤 사이사이로 숲과 절벽, 언덕, 산 정상이 어렴풋이 보였고, 맞은편에서는 아직 황혼의 금빛이 반짝였다. 넓고 화려한 강은 쉬지 않고 흘러내렸고, 강의 작은 섬들 근처에 몰려 있는 아름다운 물새들은 워낙 유순해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았다."라는 수려한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풍광 끝에 에레혼이 있다. 에레혼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자연에 대한 묘사는 특히 아름답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거기에 가 있는 기분이 든다."라고 했던 주인공의 말이 책을 읽고 있는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싶었다. 에레혼에 들어가기 직전의 묘사가 극적이라,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에레혼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감 있게 전해진다. 마치 어디에도 없는 곳이지만 어딘가에 꼭 있는 곳처럼 말이다.

풍자 소설, 《에레혼》

버틀러는 에레혼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통해, 제국주의가 팽배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비판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레혼》을 가리켜 풍자소설이라고 한다.  좋은 소설은 시대를 넘나드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단지 한 시대만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몇 세기가 지나서도 유효한 소설을 가리켜 명작이라고 한다. 《에레혼》이 명작이자 고전으로 평가 받는 건, 빅토리아 시대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유효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걷는 듯한 풍경 끝에 닿은 에레혼에 대한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 수록 지금 이시대를 말하는 것 같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것이 미덕이며, 병들게 되면 감옥에 갇히는 곳. 실용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무능함을 가르치는 대학과 인간의 다양한 감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곳. 이상한 곳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 우리 사회가 가진 병폐와 닮아 있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말이다.

 

에레혼 사람들이 도덕적 결함을 성격이나 환경상의 불운 탓으로 돌리면서도 영국에서라면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었을 불운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이상했다.

가장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인 사람들이 모인 유토피아인 에레혼의 모습은 오히려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거나,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에 대한 '공감'이 사라진 사회 그 자체였다. 버틀러는 빅토리아 시대에 기술 발전과 산업화로 인해 사람들 간의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상을 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의 내적 심리를 있는 에레혼 사람들의 행동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상실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방문자이자, 에레혼 사람들에게 주시를 받고 있는 주인공은 조금씩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지만, 이내 그의 논리는 불온한 생각으로 치부된다. 그 역시 자신의 생각을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는 에레혼의 논리처럼 말한다. 그의 내적 발화와 실제로 그가 실제로 (에레혼 사람들에게) 듣는 발화 사이의 충돌은 우리가 사회의 모순을 목도했을 때 발생하는 내적 대화와 닮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존중할 만한 대상은 오직 행운뿐이라는 말이 널리 인정될 때까지 이처럼 조야하고 반사회적인 사례가 가끔씩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나 운이 좋아야 이웃들보다 더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는 대략 시장의 흥정에 따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야만적인 힘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쨌든지 간에 어느 누구도 매우 적절한 범위 이상으로 불운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논리적이라 할 것입니다."라는 부분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 불편함이 만연한 사회가 단지 에레혼 속 세상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른 결의 불편함을 느낀다. 다른 두 개의 불편함의 마주침이 이 책속 주인공과 에레혼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마치, 주인공이 에레혼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생각했던, "매 순간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까지 내 존재의 연속성에 대해 점점 더 섬뜩한 의구심이 찾아왔다."는 구절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에레혼에 기계는 전부 사라져 있다는 것이다. 기계가 없는 곳에서 기계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사라졌다고 믿는 인간성 상실을 부각한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들이 기계 자체가 불러올 인간의 삶의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은 또 다른 점에서 관심이 갔다. 에레혼 사람들에게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느끼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인간다움을 상실한 인간들이 자신들이 사라질까봐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어쩌면 버틀러는 인간성 상실과 인간이라는 종이 멸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별개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은 인간다움의 가치가 여러가지일 수 있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주려했던 것은 아닐까. 비이성의 대학에서 기계의 책까지 내용은 기계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두려움과 이성을 상실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에레혼에서 교정의 대상이자, 무시와 멸시의 대상이 된다.


소리 없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살금살금 인간은 기계에 구속되고, 인간과 기계의 욕망이 충돌할 일도 없을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기계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에레혼의 모습은 어쩌면 AI시대를 당면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비슷해보인다. "기계에게 영향을 미치고 기계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듯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기계다. 인간은 현재의 다양한 고통을 겪거나 아니면 점차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에 의해 스스로 대체되는 것을 보는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해야 하며, 그러다가 들짐승이 인간과 비교가 되지 않듯 인간도 기계와 비교가 되지 않을 때가 온다." 이는 기계의 책에 대한 내용은 기계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버틀러의 통찰을 확인할 수 있다. 에레혼 사람들이 왜 기계에 대해 공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까. "기계의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 때문에 인간의 삶이 노예화되고 비참해질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들은 기계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 뒤에 놓인 기본 법칙 자체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아마 버틀러가 차용한 다윈의 이론(종의 기원)이 그 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에레혼》

나에게 《에레혼》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 에레혼. 하지만 그곳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할 수 있는 기계 문명이 움트지 못한 곳이었다. 이 모순된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기계를 원천적으로 봉쇄된 에레혼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 자체였기에. 어쩌면 인간성이 상실은 기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새로운 가정을 던졌다. 물론, 이 가정에 대한 결과값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기계 문명이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라는 명제는 깨졌다. 난 인간성 상실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기계문명이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 된다는 단편적인 생각에서 인간다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에레혼》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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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
이용한.한국고양이보호협회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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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서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관계인 셈이죠. 따뜻한 봄이 오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봄밤에 바람을 타고 들려올 때면,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통에 담기 때문에 길고양이의 습격을 받는 모습도 좀처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싫어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고양이와 같은 환경을 공유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도시공간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길고양이를 처음 알게 된 때는 아이러니하게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 가면 익숙했던 모습이 시골 길고양이들이 밥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저녁 시간에 집 담벼락 구석진 곳에 물과 고양이밥을 놓아두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10마리 남짓한 고양이들이 와서 밥을 먹곤 했던 모습입니다. 지금은 그 고양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좀처럼 고양이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어린 시절 먼발치에서 바라본 해 질 녘 고양이 무리들이 밥을 먹는 모습은 포근한 할머니 댁 풍경과 함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밥을 준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도 전 먼발치에서 고양이들이 밥 먹는 모습을 몰래 관찰하며 거리를 두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길고양이 공존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작년에 방영했던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의 11,12화 에피소드를 보았을 때입니다. (그 이전에 여러 가지로 사건으로 관심을 받을 법도 했지만, 잔인한 장면들이 시각적으로 들어와서인지 더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시청했던 사람들 중에 많은 분들이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들의 잔인성을 간접적으로 인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드라마가 저를'캣맘'의 길에 들어서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저는 고양이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지구는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며, 도시 역시 도시민만의 공간이 아닌 것을 인지할 필요성을 느낀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도시 공간을 공존하는 도시민으로 읽으면 좋은 책 <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입니다.

 

고양이를 적대시하는 사람들과 길고양이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사람과 고양이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는 길고양이와 시민 간의 공존을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길고양이에 대한 편견, 길고양이가 왜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공존관계가 형성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사람과 고양이가 모두 행복하고 안락하게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면,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글을 서술했으며, 고양이의 습성과 길고양이만의 독특한 습성을 함께 고려한 점이 돋보인다.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으며 "길고양이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과 "길고양이, 이것이 궁금하다"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가 흔히 할 수 있는 길고양이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도시공간에서 바람직한 공존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길어야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삶을 살아가는 고양이들(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15년을 산다고 한다.)이 그 시간조차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웠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지식이 좀처럼 알려지지 않아다는 사실에 또 안타까웠다. 길고양이의 수명이 평균 3년이라는 점에도 놀랐지만 가장 놀라웠던 점은 고양이의 번식 능력이었다.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이를 위해 포획, 중성화 수술 그리고 방생의 과정인 TNR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캣맘이 아니기에 고양이의 습성에 대한 부분에 대한 부분보다 길고양이가 우리 사회에서 편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부분에서 공감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길고양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가 길고양이에 대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길고양이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장 공감했던 문제 제기는 '언어'에 대한 부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길고양이 공식 명칭이 '도둑고양이'라는 점은 개선해야 할 점이다.

"국어사전에는 길고양이 대신 도둑고양이가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는데, 그 의미 또한 "주인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몰래 음식을 훔쳐 먹는 고양이(표준국어 대사전)."로 정의돼 있다(2017년 말 현재 정의는 "사람이 기르거나 돌보지 않는 고양이."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도둑고양이를 표준어로 유지하는 중이다)."

언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우리 사고에 관여할 여지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도둑고양이보다 '길고양이'나 '길냥이'를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만, 공식 명칭이 길고양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줄 수 있으며, 이를 개선하는 것은 정말 꼭 필요하다. 실제 미국에서도 뒷골목 고양이에서 방랑 고양이로 표현을 순화했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이 문제 제기가 보편화되어 다른 표현으로 순화하길 바란다.
"인간의 성격이 저마다 다양하듯 길고양이 또한 한 마리 한 마리 개성이 다른 '묘격체'"이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그리고 "먹이를 찾아다니는 일과 로드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엄청나지만, 실은 길고양이를 위협하고 위해를 가하는 최대의 적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에 마음 아팠다. 많은 나라에서 "고양이는 학대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공존의 대상"이며, "역사적으로 고양이는 5000년 이상 인류"와 공존해왔듯이 우리나라에서도 공존할 수 있길 바란다.


무엇보다 길고양이에 대한 막연한 동정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생각을 꼭 함께 나누고 싶었다.
  

 

 


이 책의 수익금 일부는 길고양이 구조와 치료를 위한 지원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책 안에 '길고양이 사료(먹이) 안내'와 '쥐약 및 독극물 살포 금지' 스티커와 길고양이 스티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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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리뉴얼판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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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이 책의 일부분은 - 어쩌면 너무 많은 부분이 -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소설의 목표는 정확한 문법이 아니라 독자를 따뜻이 맞이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_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글쓰기에 대한 책, 난 많이 읽어왔다. 위인이 된 인물들의 글쓰기 비법, 연설문을 쓰는 분이 쓴 글쓰기 비법,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 비법, 논술 강사가 들려주는 글쓰기 비법(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운다』 『대통령의 글쓰기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등)... 글을 잘 쓴다고 널리 알려지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쓰고 정리한 비법서들을 많이 읽었다. 또 글쓰기 관련 강좌가 있다면, (가급적이면)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들은 글쓰기 강좌도 제법 많이 있다. 이렇게 글쓰기에 대한 책과 강좌에 관심을 쏟은 이유, 간단하다. "글을 잘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은 건 다른 글쓰기 책을 읽었던 이유와 같았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고, (내가 생각하기에 글을 잘 쓰는) 주변 사람의 추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만 10만 부, 세계적으로 더 많이 팔린) 사랑받은 책이니 특별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아서 읽었다. 스티븐 킹 작가는 《쇼생크 탈출》, 《미저리》, 《그것》의 원작자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들에게 독특한 작품으로 각인된 사람이다.  하지만 난 그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고, 그의 작품 가운데 영화화된 작품 역시 한 편도 보지 않았다. 『유혹하는 글쓰기』를  다 읽고 그에 대해 검색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가 정말 아주 많이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그리고 안도했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면, 난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지 않았을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스티븐 킹을 알고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었을 수도 있고, 혹은 제목에 매료되어서 읽었을 수도 있고,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을 수도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읽게 되었는지는 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유혹하는 글쓰기』를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기억에 남는 것에 이건 모두 있을 것이다. 작가 스티븐 킹이 가진 작가로써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실'의 중요성!

소설의 소임은 거짓의 거미줄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지, 돈벌이를 위해 지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다.
_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글을 쓸 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건 기자(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과 사실이지만)라고 생각한다. 보통 소설가에게 우리는 '진실'을 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소설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재미'다. 얼마 읽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는 그 마법을 기대한다. 그는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야기의 내용이 독자 자신의 삶과 신념 체계를 반영하고 있을 때 독자는 이야기에 더욱더 몰입하게 된다."라고. 독자가 더 몰입하기 위해서는 더 사실적이고, 진실에 가까워야 몰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단지 내용을 구성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적이고 공감을 주는 대화문을 쓰려면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망치로 엄지를 내리쳤을 때 사람들이 내뱉는 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점잖은 체면 때문에 '이런 제기랄!' 대신 '어머나 아파라!'라고 쓴다면 그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의 약속을 어기는 짓이다. 여러분은 꾸며낸 이야기를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진실을 표현하겠다고 이미 독자들에게 약속한 셈이니까." 그의 소설 속 인물들 대화는 거칠고, 험악하고 억센 표현이 툭툭 나온다. 다듬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이 인물들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가 그렇게 대화문을 구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제와 주목을 받기 위해서 자극적이게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에 대해 글로 발굴하는 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이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서 표현을 '사실'적으로 할 뿐이다. 표현을 다듬는 순간, 이야기는 금가거나 어느 한 귀퉁이가 잘리기나 유실되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에게 세상에(독자에게) 자신이 말하고 싶은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이고, 글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주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한 문장으로 완성된 주제를 두고 살을 붙여가는 것이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주제에 대해 "나의 삶과 생각에서 비롯되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비롯되고, 또한 남편으로, 아버지로, 작가로, 또 연인으로 살아온 나의 역할에서 비롯된 관심사들일 뿐이다. 밤이 되어 불을 끄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될 때, 그리하여 한 손을 베개 밑에 넣고 어둠 속을 들여다볼 때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문제들"이라고 말한다.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미 자신의 몸속에 누적된 삶이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말이다.

역시 좋은 글이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_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말하는 '글'은 소설이다. (혹은 시가 될 수도 있다.) 좀 더 큰 범주에서 말한다면, 문학이다. 만약 대학생이 '글쓰기 과제를 잘 하는 법'이나 '교수님에게 유혹적인 글 쓰는 법'을 기대하고 읽었다면, 아마 "이력서"를 읽다가 말았을 것이다. 혹은 이력서가 재미있었다면, "연장통"까지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티븐 킹이 말하는 글쓰기 방법으로 과제에서 요구하는 글쓰기를 할 수 없다. 책을 많이 읽고 내 방식대로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써야 하는데, 교수님은 책을 많이 읽을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도 없고 각자의 개성이 묻어난 글을 평가할 수 없고, 성적을 매기기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책이 아니라 성적을 주시는 교수님께 교수님이 높이 평가하는 글이 무엇인지, 성적 평가 기준을 물어보아야 한다. (수많은 글쓰기 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글 쓰는 방식이 다르고, 높이 평가하는 글들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성적을 잘 받는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성적을 매기는 교수님께 물어보는 것이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쓰기 책보다 도움이 된다.)
하지만 『유혹하는 글쓰기』는 '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글이다. 책 속 많은 구절에 밑줄을 쳤지만, 가장 좋았던 구절은 아래와 같다.

"나는 사람들의 환경에 의하여, 또는 자기 의지에 의하여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믿었지만). 작가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자질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조금씩은 문필가나 소설가의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 재능은 더욱 갈고닦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책을 쓴다는 것부터가 시간 낭비일 것이다."

형편없는 작가가 제법 괜찮은 작가로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작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시의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작가도 훌륭한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
_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글은 결국 '나'에게서 태어나고 멈추고 죽는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었다. 누군가를 위한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첫 번째 누군가는 '나'임을 일깨워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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