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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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너머에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이 질문에서 시작된 세상 어디에도 없는(Nowhere)에 대한 여정이 펼쳐진다. 에레혼(Erehwon)이라는 미지의 땅에 대한 이야기 《에레혼》에 펼쳐져 있다.

영국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세우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명성을 떨쳤던,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어느 식민지 (추론하자면, 뉴질랜드)의 양치기 소년의 모험담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가 든 생각은 에레혼이라는 어떤 지역 혹은 나라에 대한 참여 관찰지(민족지) 같았다. 문화인류학이 학문적 분과로 태동했을 무렵과 맞물려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마치 한 사람이 에레혼에 대해 관찰한 것과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느낌이 들었다.

모험 소설, 《에레혼》

영국은 판타지 소설과 모험 소설이 유명하다. 어느 서점에 가도 판타지 코너와 모험 소설 코너에 한가득 책이 꽂혀 있다. 판타지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 톨킨, 나니아 연대기의 C. S 루이스, 해리 포터의 조앤. K. 롤링이 있고, 모험 소설에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나라는 다르지만 걸리버 여행기의 조너선 스위프트 등이 있다. 《에레혼》은 제목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어디에도 없는 (nowhere) 판타지와 같은 나라에 대한 모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어느 식민지에 있는 한 남자는 양떼가 풀을 먹는 초원 너머의 산맥을 바라본다. 그 산맥에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궁금해하면 서 말이다. 그리고 그곳을 가보는 것, 그곳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는 것이 그에겐 이루고 싶은 목표가 된다. 아무도 가지 않았고, 어떤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는 산맥 너머를 향해 걸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가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러기만 한다면 내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승리이건만. 아직은 이런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양치기 소년은 자신이 볼 수 있는 시선 너머의 그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양치기로써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달리 자신을 벅차게 만드는 그곳에 대한 동경 끝에 그는 모험을 시작한다.

 

사실 이토록 대단한 목표를 눈앞에 두고도 목숨이 아까워 고개를 돌린다면 대체 목숨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에레혼에 가는 길은 마치 유토피아에게 가는 듯하다. "협곡의 한쪽 면이 어스름한 저녁 그림자에 푸른빛을 띤 사이사이로 숲과 절벽, 언덕, 산 정상이 어렴풋이 보였고, 맞은편에서는 아직 황혼의 금빛이 반짝였다. 넓고 화려한 강은 쉬지 않고 흘러내렸고, 강의 작은 섬들 근처에 몰려 있는 아름다운 물새들은 워낙 유순해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았다."라는 수려한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풍광 끝에 에레혼이 있다. 에레혼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자연에 대한 묘사는 특히 아름답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거기에 가 있는 기분이 든다."라고 했던 주인공의 말이 책을 읽고 있는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싶었다. 에레혼에 들어가기 직전의 묘사가 극적이라,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에레혼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감 있게 전해진다. 마치 어디에도 없는 곳이지만 어딘가에 꼭 있는 곳처럼 말이다.

풍자 소설, 《에레혼》

버틀러는 에레혼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통해, 제국주의가 팽배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비판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레혼》을 가리켜 풍자소설이라고 한다.  좋은 소설은 시대를 넘나드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단지 한 시대만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몇 세기가 지나서도 유효한 소설을 가리켜 명작이라고 한다. 《에레혼》이 명작이자 고전으로 평가 받는 건, 빅토리아 시대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유효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걷는 듯한 풍경 끝에 닿은 에레혼에 대한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 수록 지금 이시대를 말하는 것 같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것이 미덕이며, 병들게 되면 감옥에 갇히는 곳. 실용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무능함을 가르치는 대학과 인간의 다양한 감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곳. 이상한 곳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 우리 사회가 가진 병폐와 닮아 있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말이다.

 

에레혼 사람들이 도덕적 결함을 성격이나 환경상의 불운 탓으로 돌리면서도 영국에서라면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었을 불운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이상했다.

가장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인 사람들이 모인 유토피아인 에레혼의 모습은 오히려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거나,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에 대한 '공감'이 사라진 사회 그 자체였다. 버틀러는 빅토리아 시대에 기술 발전과 산업화로 인해 사람들 간의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상을 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의 내적 심리를 있는 에레혼 사람들의 행동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상실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방문자이자, 에레혼 사람들에게 주시를 받고 있는 주인공은 조금씩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지만, 이내 그의 논리는 불온한 생각으로 치부된다. 그 역시 자신의 생각을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는 에레혼의 논리처럼 말한다. 그의 내적 발화와 실제로 그가 실제로 (에레혼 사람들에게) 듣는 발화 사이의 충돌은 우리가 사회의 모순을 목도했을 때 발생하는 내적 대화와 닮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존중할 만한 대상은 오직 행운뿐이라는 말이 널리 인정될 때까지 이처럼 조야하고 반사회적인 사례가 가끔씩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나 운이 좋아야 이웃들보다 더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는 대략 시장의 흥정에 따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야만적인 힘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쨌든지 간에 어느 누구도 매우 적절한 범위 이상으로 불운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논리적이라 할 것입니다."라는 부분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 불편함이 만연한 사회가 단지 에레혼 속 세상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른 결의 불편함을 느낀다. 다른 두 개의 불편함의 마주침이 이 책속 주인공과 에레혼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마치, 주인공이 에레혼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생각했던, "매 순간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까지 내 존재의 연속성에 대해 점점 더 섬뜩한 의구심이 찾아왔다."는 구절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에레혼에 기계는 전부 사라져 있다는 것이다. 기계가 없는 곳에서 기계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사라졌다고 믿는 인간성 상실을 부각한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들이 기계 자체가 불러올 인간의 삶의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은 또 다른 점에서 관심이 갔다. 에레혼 사람들에게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느끼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인간다움을 상실한 인간들이 자신들이 사라질까봐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어쩌면 버틀러는 인간성 상실과 인간이라는 종이 멸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별개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은 인간다움의 가치가 여러가지일 수 있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주려했던 것은 아닐까. 비이성의 대학에서 기계의 책까지 내용은 기계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두려움과 이성을 상실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에레혼에서 교정의 대상이자, 무시와 멸시의 대상이 된다.


소리 없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살금살금 인간은 기계에 구속되고, 인간과 기계의 욕망이 충돌할 일도 없을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기계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에레혼의 모습은 어쩌면 AI시대를 당면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비슷해보인다. "기계에게 영향을 미치고 기계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듯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기계다. 인간은 현재의 다양한 고통을 겪거나 아니면 점차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에 의해 스스로 대체되는 것을 보는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해야 하며, 그러다가 들짐승이 인간과 비교가 되지 않듯 인간도 기계와 비교가 되지 않을 때가 온다." 이는 기계의 책에 대한 내용은 기계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버틀러의 통찰을 확인할 수 있다. 에레혼 사람들이 왜 기계에 대해 공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까. "기계의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 때문에 인간의 삶이 노예화되고 비참해질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들은 기계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 뒤에 놓인 기본 법칙 자체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아마 버틀러가 차용한 다윈의 이론(종의 기원)이 그 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에레혼》

나에게 《에레혼》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 에레혼. 하지만 그곳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할 수 있는 기계 문명이 움트지 못한 곳이었다. 이 모순된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기계를 원천적으로 봉쇄된 에레혼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 자체였기에. 어쩌면 인간성이 상실은 기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새로운 가정을 던졌다. 물론, 이 가정에 대한 결과값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기계 문명이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라는 명제는 깨졌다. 난 인간성 상실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기계문명이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 된다는 단편적인 생각에서 인간다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에레혼》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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