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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번던스 - 혁신과 번영의 새로운 문명을 기록한 미래 예측 보고서
피터 다이어맨디스.스티븐 코틀러 지음, 권오열 옮김 / 와이즈베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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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은 어떤 미래를 원하십니까?
빼어난 웹툰 작가 하일권은 <3단 합체 김창남>에서 미래의 모습을 그려낸다. 허나 그것은 우리의 소망과는 다르게 지금 시대와 닮은 구석이 많고, 그래서 디스토피아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재개발, 왕따, 질병, 알콜 중독, 양극화, 빈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고삐 풀린’ 자본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사회적 배제와 차별은 계속되었고, 사회는 진보하지 않은 것이다.
동시대인들의 책임은 지구의 미래가 저러한 디스토피아에 가닿지 않도록 막아내는 것이 아닐까? 이를 원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이미지를 진보와 혁신 그리고 희망과 행복으로 치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세상은 잰걸음으로라도 나아가고 있다.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미래의 영토로 말이다. 이 노력에 일정한 성과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평균 수명은 증가하였고, 살육은 감소하였으며, 과학기술은 일상화되었고, 소통의 범위는 장대해졌다. 물론 OECD국가에서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임박한 파국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말한다. 이대로라면 우리 모두 망하고 말 것이라고. 일부의 몽상가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SF영화를 너무 자주 본 탓일까? 하긴 그것들은 미래 사회를 불모지나 첨단 기술의 지옥으로 묘사하곤 하였다.
얼빠진 몽상가만이 주목받기 위해 지구멸망론을 펼치고 다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나 깨나 보편성을 염두하며 호흡하는 지성들도 파국을 현실적인 위협으로 여긴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장기 비상사태>, <자레드 다이아몬드의 <붕괴:사회는 어떻게 실패 또는 생존을 선택하는가>, 유진 린든의 <변화의 바람:기후와 문명의 파괴> 등의 저서가 지구적 대재앙의 시나리오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린든은 말한다. “이 시대는 1938년, 즉 제2차 세계대전 직전보다 훨씬 더 암흑의 시기”라고. 범죄 위험, 생태적 위험, 정치적 위험, 질병의 위험, 테러의 위험 등 위험 아닌 게 없다. 심지어 인간 자체도 ‘악성 종양’으로 간주되는 형국이다. 이들은 한 술 더 뜬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빠지고 있다.”며. 이러한 호들갑에 날을 세우는 사회학자 프랭크 퓨레디는 비꼬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단지 <요한계시록>의 네 명의 기사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전파하고 다니는 연대 규모의 기병 부대를 가지고 있다.”
당신의 미래는 윤택할 것이요
다른 이들에 비해 지나친 ‘긍정적 마인드’를 내장한 탓일까? 미국인 피터 다이어맨디스와 스티븐 코틀러는 새 책 <어번던스abundance>를 통해 우리들의 미래는 윤택할 것이라고 낙관한다. abundance는 풍부, 충만, 윤택, 넘칠 만큼 많음을 뜻한다. 그들은 미래학자적인 수사학으로 우리의 미래가 “유례없는 풍요와 번영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물론 그들이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대책 없는 비관론자가 더 큰 문제의 근원이며, 맹목적 낙관보다는 풍부한 사례와 단단한 논리로 어두운 비관주의의 해독제가 되고자 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각종 혁신 기술이다. 나노 기술, 생명 공학, 로봇 공학 등이 긍정적 미래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이 새로운 기술결정주의는 새로운 기술의 발명과 적극적인 활용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과학 기술이 인류를 멸망케 할 위력을 지녔음에도 결국 그 폐해는 더 뛰어난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나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만.
디스토피아 아닌 미래를 위하여
퓨레디가 “21세기 초의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틀 짓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공포”라 규정해야 되었을 만큼 파국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두려움은 과잉이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희망의 노래가 담긴 <어번던스>는 도드라져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청사진이기에 충분한 것인가는 의문이 든다. 우리의 미래가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결정주의’말고도 추가로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게 내 입장이다.
오늘의 진보는 더 이상 과거의 진보가 아니다. 진보의 주체도 다르다. ‘인원감축’, ‘구조조정’이 기업에 입장에서는 ‘진보’인 것처럼, 기존의 언어가 지시하는 가치는 시장이 전유한지 오래다. 나오미 클라인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빌 게이츠가 살면서 550억 달러의 재산을 축적한 마을이지만, 그의 전 직원 가운데 3분의 1은 임시 노동자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후자 혹은 우리 중에는 <어번던스>의 저자들이 제시하는 ‘줄기찬 풍요의 증거’를 확인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이들도 많은 게 현실이다.
불평등, 양극화, 차별,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미래의 선결과제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기술들이 기여하는 바도 분명 있겠지만, 정치를 통해 공동의 가치를 정립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다 잘 될 것이다.’와 같은 섣부른 예측보다는 ‘해야만 한다.’는 정치적 합의와 결정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