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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현대 국가의 두 척추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다.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이 그러하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칙을 고수한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1원 1표의 원리로 작동한다. 미세한 차이 같지만 어마어마한 성격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성격 차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 구절. 그렇다. 그것은 부부가 이혼 사유로, 커플이 이별의 이유로 빈번하게 지목하는 것이다. 이 고질의 성격 차이의 덫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도 피해갈 수 없었다. 동시대의 철두철미한 관찰자 슬라보예 지젝은 현시점을 이 둘이 이혼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2012년 12월 21일의 대망의 지구 종말의 날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종말은 오지 않았다. 한 트위터리안은 지구 종말이 우천으로 취소되었단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또 다른 종말론이 찾아올 게 분명하지만 한동안은 잠잠할 것으로 보인다. 지젝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왠 '지구 종말'이 튀어나왔나 싶을 게다. 지젝이 했던 말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류가 지구 종말에 대한 상상력은 넘쳐나는데 이상하게도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
그는 어떤 포지션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지젝은 공공연하게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밝히고 다닌다. 그렇지만 당신의 머릿속 공산주의자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공산주의가 1990년대에 붕괴된 체제를 가리킨다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예전의 현실 공산주의 체제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다.
차라리 그는 그 낡은 유토피아에 대한 적극적인 반성적 성찰을 시도하는 정치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섣불렀든, 조급했든, 소극적이었든, 과격했든, 좌파의 이상이 왜 실패로 끝이 났고, 오늘날에도 연쇄적인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깊이 사유한다. 특히나 그가 예각을 세우는 부분은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사소한 저항'에 대해서다. 지젝은 이들이 콩깍지에 씌어있는 게 아닌지 묻는다.
그들은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면서 안도감을 느끼고, 스타벅스를 마시며 공정무역 거래에 참여했다는 만족감을 구가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지젝은 '자본주의 시대의 미신'이라고 일갈한다. 현재의 세계 질서는 너무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이러한 '미신의 신념구조'에 갇히는 데 안주하는 일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적 감수성을 지닌 모두는 급진적인 대안 체제의 구조를 설계하고 제출하는 일에만 몰두해야 하는 것일까. 대안이 시급한 시기인 것은 맞지만 이미 너무 많은 대안이 제출되고 있는 상황, 그러나 '대안은 없다'라는 말이 너무도 자주 사용되는 이상한 상황이 지금이다. 대안 제시는 주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대다수 동시대인들에게 대안은 묘연한 것, 아득한 것, 시야 밖에 있는 것, 먼 미래의 이야기로 느껴질 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기 위해 애쓰지만 현실은 더욱 각박해지고 적응은 너무도 어려워지고 있다. 모순적이게도 이들은 더 나아가 '대안이 없으면 문제 제기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누군가 체제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 '그래서 대안은 있는가?'라고 되묻는 장면, 생생하지 않은가. 대안이 부재하는 이 세계는 또한 문제의식이 지워진 세계이기도 하며, 대안 사회와는 더욱 멀어져가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는 그 '문제'들과 함께 썩어간다. 대안을 꿈꾸는 자가 있다면 '우린 다 먹여 살릴 식구들이 있잖아'라며 핀잔을 주는 게 일반 상식처럼 통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냐며 말이다. '정신 차리게 이 친구야' 소리 안 들으면 다행이다.
그런데 지젝은 "허풍 떨지 않겠다. 지금 상황은 정말 비극적"이라며 위와 같은 상황에 제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데, 명확한 탈출구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젝은 그래도 '진보'라 불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취약하고 모순적인 저항은 잠시 접어두고 멈춰 서서 사유"하라고 말이다. 당장에 해결책을 발견하려고 힘쓰기보다는 무엇이 문제인지부터를 차근차근 발견해야 한다며 말이다. 그의 신간 <멈춰라, 생각하라!>는 이를 위한 더 없이 좋은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