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깊은 숲의 한가운데를 걸으면서 숲에 대하여 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란 힘들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의 한가운데서 이 작품을 이야기하기가 갑자기 힘들게 느껴진다. 1부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66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라진 친구 릴라의 이야기로 시작한 나폴리 4부작은 3부에서 화자인 레누의 결혼, 피렌체에서의 삶, 그리고 출산과 육아를 겪는 20대와 30대 초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제 마지막 4부만 남았다. 겨우 1권이 남았는데 아직 이야기는 겨우 반 정도만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그들의 관계를 만들고 다져가게 했던 수많은 에피소드로 넘쳐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어 만든 첫 소설의 대성공, 그리고 첫사랑 리노와의 만남, 멋진 집안과의 결혼, 그리고 나폴리를 떠나 피렌체에서 살게 된 레누의 이야기가 3권의 대부분이다. 릴라는 나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햄공장에 다니며 엔초와 함께 아들을 키우며 산다. 그리고 엔초와 밤마다 컴퓨터를 공부한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는 청춘의 시기에 접어든 이들이 사는 이탈리아 사회의 대변혁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대학마다 벌어지는 학생시위, 공장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의 시위,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그리고 여성의 지위까지 진지하게 논의된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들의 생각과 행동은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강의가 없는 빈 강의실에서 담배연기 자욱한 커피숍에서 술집에서 세상의 모든 모순과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전사처럼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던 우리들이 겹쳐졌다. 그 당시의 진지하고 심각했던 고민들은 그러나 졸업한 뒤 나름의 사회생활 속에 한때의 추억이 돼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책으로만 배운'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레누의 갈등과 고민, 그리고 현장에 있는 릴라의 이야기가 마치 내가 겪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 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레누는 그렇게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스스로 자리 잡아 버렸고, 반면 릴라는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였다. 햄공장의 일로 릴라가 힘들 때 레누는 릴라를 데리고 피렌체로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릴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너는 강하잖아. 나는 그렇지 않아. 너는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네 자아를 되찾고 행복해하지. 하지만 나는 큰길 입구에 있는 터널만 지나도 두려워. 예전에 함께 바다를 향해 가는데 비가 왔었던 때를 기억해? 우리 중에 누가 계속 가려고 했고 누가 돌아가려고 했는지 기억해?"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릴라는 머무르려고 하는지.
소설은 '인간이라는 기이한 피조물에게 존재하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분신 같은 존재인 두 친구, 릴라와 레누는 그렇게 머무른 자와 떠나간 자로 나뉜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기대는 더 강해진 것처럼 보인다.

 난 네가 항상 최고였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이보다 훨씬 뛰어난 글을 쓸 수 있다고 확신해. 네가 더 잘하기를 원해. 그게 내 가장 큰 소망이야. 네가 뛰어나지 못하면 내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레누의 홀로서기는 시작됐다. 릴라에게서 흘러오던 일종의 영감이 그 영향이 끊긴 레누는 혼자 고민하게 된다. 이제야 스스로를 돌아보는 레누는 릴라를 통해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릴라와 분리된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고 이제야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글을 쓰게 된다.

내 사고방식과 언어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게 되려고 나는 나 자신과 어떤 비밀스러운 협상을 맺었던가. 배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배운 것 가운데 무엇을 잊으려 애써야 하나. 게다가 나는 릴라와 닮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릴라와 일치시키려 했다. 릴라에게서 분리되려고 할 때마다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릴라가 없으면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릴라 없이는 내 생각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 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동안 무엇인가가 되기는 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뚜렷한 대상도, 진정한 열정도, 확실한 야망도 없이 말이다. 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뒤처질까 봐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뭐라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바랐지만 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오직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릴라에게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말이다.

나폴리에 머무른 릴라는 그리고 나폴리를 떠나간 레누는 이제 각자 서로의 길을 걷게 될까? 그 분신 같던 유대감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 이제야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은 둘은 어떤 삶을 맞이하게 될까? 4부가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