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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어서 문학, 즉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고 나니 왜 문학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목소리 소설, 이 낯선 단어로 이 작품을 대변하기가 쉽지는 않다. 물론 이 책은 약 500여 명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전쟁의 이야기를 담았다. 하지만 만약 이런 형식이 아니라 작가가 개입해 이야기를 재구성해 낸 작품이었다면 과연 우리가 이 이야기에 그렇게 빠져들었을까? 작가는 이름 없는 전쟁의 목격자나 참전자의 이야기를 통해 살아나는 역사가 알고 싶었고, 그 역사를 문학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수많은 말 줄임표가 있다.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런 면에서 완성된 문학작품으로는 보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는 그 말 줄임표에 울컥하고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어진다. 어떤 형식으로든. 그럼으로 해서 이 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몫으로 전해진다.
작가는 이 책의 서문 격인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일기장에서)에서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라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는 정확히 통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전쟁이 가져온 삶과 인생에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그렇고 꾸역 꾸역 눈물을 삼키며 읽어내던 독자도 그렇고 "1941년 소녀들, 그녀들은 왜 전쟁에 참여했을까?"라는 질문을 한다.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 번 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체르노바는 당연히 아이를 기다렸지..... 삶을 사랑했고 또 살고 싶어 했지. 당연히 두려워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길을 갔어..... 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는 무릎을 꿇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은 거부했어. 적에게 굴종하는 삶 따위는...... 어쩌면 우린 눈이 멀었던 건지도 몰라. 그리고 그때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동시에 순수했어. 우리는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당신은 그걸 꼭 알아야 해......" -베라 세르게예브나 로마놉스카야, 빨치산 간호병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 '아,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조국이 가르쳐 준대로 조국의 부름에 달려간 그녀들은 지도자들이 심어 준 사상의 순수함을 믿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복,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 바로 그걸 믿었다. 그녀들은 꿈꾸는 자들, 이상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눈먼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은 전쟁의 승리를, 살아서 돌아갈 것을 믿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돌아와서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시댁에 갔을 때 시댁 식구들의 거부를 봐야 했고, 전쟁터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1년 뒤 남편은 새로 만난 여자한테서는 향수 냄새가 나지만 당신한테서는 군화와 발싸개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하고 떠난다. 지금도 전쟁영화가 색색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그들은 여전히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
그들이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이라고 말한 한 참전자의 이야기처럼 기억되지 않았을 때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에 대한 책이 많지만, 이토록 처절하게 비인간적인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는 책은 없었다. 전쟁 속 죽음 앞에 '장렬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전쟁을 미화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책을 덮으며 한 참전자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는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수많은 참전자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같이 울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꼭 기억할 것이다.
우리 이야기는 꼭 안 써도 돼. 우리를 잊어버리지만 마. 당신과 내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눴잖아. 같이 울었고. 그러니까 헤어질 때 뒤돌아서 우리를 봐줘. 우리들 집도. 낯선 사람처럼 한 번만 돌아보지 말고 두 번은 돌아봐 줘. 내 사람처럼. 다른 건 더 필요 없어. 뒤돌아봐주기만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