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의 아들
에셀 릴리언 보이니치 지음, 김준수 옮김 / 마마미소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내가 읽은 영어 소설 중 이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없다." 버트런드 러셀이 이 소설을 보고 했던 이 말에 끌렸다. 어떤 감동을 받았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한 제목에서 호기심을 느끼기도 했다. '추기경의 아들' 이것은 막장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익히 들어봄직한 스토리에 예측이 가능한 이야기 전개,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드러나 버렸어야 하는 진실인데도 서로 엇갈리고 조금의 차이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일일드라마 같은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주인공 아서는 영특하고 영혼이 맑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게다가 순결 서약을 한 신부가 그의 아버지다. 그는 그것에 대한 배신과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기득권층의 위선과 거짓, 특히 로마 가톨릭에 반감을 품고 청년이탈리아당에 가입해서 혁명을 꿈꾸다가 붙잡혔다 나온다. 게다가 사랑하는 여인이 배신한 줄 알고 이탈리아를 떠나 13년을 떠돌다 펠리체 리바레스라는 가명으로 다시 돌아와 정치를 풍자하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그의 필명은 Gadfly, 쇠파리다. 재앙, 귀찮게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그는 성직자들, 특히 추기경이 된 자신의 아버지를 공격한다. 하지만 그는 붙잡히게 되고 드디어 자신의 아버지인 추기경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 하느님과 아들 중 누굴 더 사랑하느냐고.

이 책이 발간된 해는 1897년이라고 한다. 청년이탈리아당이 활동하던 시기는 1830년대 이후다. 여전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은 중세와 근세의 혼란기였을 것이다. 이 책은 아마 그 시대에 적절한 의문을 던졌을 것이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그 시대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이 책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책은 보다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아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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