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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를 나는 우리나라 문학 중 최고의 문장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김훈 작가의 문장은 단정하고 깊다.
"나는 적의 적의(敵意)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이 있고
함대는 없다. "라는 문장이 주는 긴장감과 집중력은 <라면을 끓이며>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감히 김훈식 문체라고 하고
싶다.
"나는 사전에 실린 그 많은 개념어들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겨우 그 뜻을 짐작하는 단어도 고삐를 틀어쥐고 부리지는 못한다. 그 단어들은 낯설어서 근본을 알 수 없고 웃자라서 속이
비어있다. 말이 아니라 헛것처럼 느껴진다."
김훈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어느덧 내
허리가 꼿꼿이 선다. 김훈의 글이 가져다주는 긴장감 때문인 듯하다. 그의 글은 화려함도 걷어내고 울고 웃는 감정도 덜어낸 깊은 마음속
우물물같이 차고 맑다. 깊고 맑은 눈매로 자신을 그리고 주변의 사물과 사람을 긴 시간 들여다보며 연필을 꾹꾹 눌러썼을 것 같은 그의 글은 그래서
비애가 느껴진다.
김훈은 라면을 끓이며, 뚱뚱한 김밥의
옆구리가 터져서, 토막 난 내용물이 쏟아져 나올 때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가 느껴진다고 하지만, 나는 김훈의 글을 읽으며
작가로 사는 김훈의 비애가 느껴진다. 사람을 관찰하고 여행을 다니며 세계를 보는 작가는 세계의 표정과 내용의 느낌으로 가득 차 여관으로
돌아오지만 그 느낌이 대부분 언어화되지 않아 비애를 느낀다. 숲을 향하여 할 말이 쌓인 것 같아도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아 들끓는 말들이
변방으로 몰린 느낌을 갖는 작가는 말이 헛것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글에 머물지 않는다. 연필로 글을 쓰는 그는 몸으로 글을
쓰는 작가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살아있는 육체성의 느낌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몸의 느낌을 스스로 조율하면서 나는 말을 선택하고 음악을 부여하고 지우고 빼고 다시 쓰고 찢어버린다."
그가 만져보고 싶은 세상은 결국 만져지지
않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연필을 쥔 손이 무참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가 그의 산문의 제목을 <라면을 끓이며>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임꺽정을 읽고 느낀 그의 표현처럼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라면을 끓여
먹고사는 일을 가장 열심히 소중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구체성과 사실성이며 거기에 탄탄히 뿌리박은 이들의 건강함을 닮고 싶었던 듯 보인다.
끝없이 추상으로 내닫고, 이유를 들먹이며 사는 지금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