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 스캔들 - 불꽃 같은 삶, 불멸의 작품
서수경 지음 / 인서트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1.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유지했다

슈타른베르게르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다

 

우리는 회랑에 머물렀다가

햇볕으로 나가 호르가르덴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시간이나 이야기 했지...

 

 

위의 시는 T.S.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다. 이 시에 대해 학계의 통설은 현대문명의 정신적 황폐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밀러라는 학자에 따르면 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한 이유는 현대 문명의 폐해니 뭐니 하는 그런 거창하고 복잡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4월에 엘리엇이 가장 사랑하던 애인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애인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고, 1차 대전 중에 사망한 장 베르디날이라는 이름의 소르본느 재학생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엘리엇은 이 남자와 각별하게 지냈고, 장 베르디날이 죽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비비안이라는 여성과 갑작스러운 결혼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결혼은 실패한 결혼이 되고 만다. 게다가 신혼의 아내를 데리고 여행을 갔던 자신의 친구에게 고맙다고 했다는 데. 물론 엘리엇은 죽을 때까지 동성의 연인에 대한 말을 삼갔다고 한다. 하지만 의심이 가는 한가지 사실은 자신의 첫 번째 시집의 헌사를 25세에 전쟁터에서 요절한 이 친구에게 바쳤다고 하는 것과 엘리엇 자신이 <황무지>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시이며, 라일락꽃을 흔들며 룩셈부르크 공원을 가로질러 오던 친구의 생생한 기억에 의한 시라는 고백이다.

물론 이런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엘리엇의 개인 사생활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는다. 그렇지만 이런 문학작품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요즘에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는 문학작품과 독자와의 사이를 좁혀줄 좋은 요소가 된다.

우리는 헤밍웨이를 읽으면서 헤밍웨이가 되고,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프루스트가 된다. 그들이 만든 작품 속 인물이 되기도 하고 작가가 되기도 하고, 혹은 배경과 감정에 흠뻑 빠져있기도 한다. ​그런 독자에게 <영문학 스캔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작품 속의 인물과 혹은 배경이나 작가와 동일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작품, 걸작을 쓴 작가들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소설 같은 삶을 살다간 것에 놀랍기도 하고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아님에는 확실하다. 프루스트 또한 자신이 게이임에도 자신을 게이라고 암시한 기자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을 남색가로 취급했다고 연인의 부친을 고소했다. 결국 와일드는 영국 동성애 금지 처벌법 제1호 판정을 받고 2년의 옥살이를 했으며 가정은 파탄이 났다. 왜 이 위대한 작가들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를 지니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들이 쓴 위대한 작품들은 이들에게서 훨훨 벗어나 스스로의 생명력을 장착한 채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다. 어쩌면 이들의 작품이 작가들의 영혼을 먹이로 삼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작가들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고통받아 스러져버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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