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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을 죽인 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고조선에 있었던 8조 법금 중의 하나다.
한 사람의 목숨의 값은 그를 죽인 이의 목숨으로 갚는다는 말은 한 사람의 생명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탐구가 확산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일부 국가들은 사형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회는 2003년 7월, 45개 회원국에서 전시상황에서도 사형제를 전면 금지하는 의정서를 발효시켰다. 앰네스티의 조사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전 세계 105개국이 사형제를 폐지했고, 35개국은 최근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 폐지국이다. 2014년 기준으로 OECD 국가 중 실제 사형제를 시행하는 국가는 미국과 일본뿐이다. 사형제도가 있었던 때도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 사형제가 거의 없어진 지금도 이 두 가지 제도의 공통점은 인간의 존엄성에 있다.
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생각이, 특히 현대인의 입장에서 사형제도의 폐지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타당성을 지니며 진보적이고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살인사건을 당한 피해자 가족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폭력으로 특히 국가라는 단체에 의한 제도적인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여전히 이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미묘한 대척점에 놓여있는 주제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가며 책을 읽는 독자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고 있다. 그래서 살인자의 경우나 피해자의 경우 서로 다른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딸이 도둑에게 살해당한 후 이혼을 하고 연락도 없이 따로 살아가던 나카하라와 사요코. 아빠인 나카하라는 이혼 후 반려동물 장례사로 조용히 살고 있었지만 엄마인 사요코는 사형제도 폐지론에 대한 반대 활동도 하면서 그 사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또 다른 인물에 의해 살해된다. 딸을 잃고 또 아내까지 잃은 나카하라를 통해 만나는 살인과 사형제도를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양한 눈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딸을 살해한 히루카와를 사회로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아내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인공과 아내를 죽인 백발의 노인은 사형이라는 같은 방법으로 혹은 참회를 했기에 모두 용서를 해야 하는 걸까?
"사형 폐지론 중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의견은 억울한 죄로 사람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내가 사형제도에 의구심을 품는 것은,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만약 최초의 사건에서 히루카와를 사형에 처했다면 내 딸은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계획적이든 아니든, 충동적이든 아니든, 또 사람을 죽일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유기형을 내리는 일이 적지 않다. 대체 '이 살인범은 교도소에 몇 년만 있으면 참사람이 된다'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살인자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십자가라도, 적어도 감옥 안에서 등에 지고 있어야 돼요.
나는 사형제도 폐지론을 옹호하던 입장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조금 복잡해졌다. 쉽게 그리고 단언하여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책을 덮고 난 후 오히려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