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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평점 :
3초 만에 읽고 오랫동안 기억되는 시, 마치 요즘 광고의 카피처럼 강렬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입에서 맴도는 짧은 문장. 이런 시가 바로 하이쿠다.
'숨 한 번의 길이만큼의 시'라고 불리는 하이쿠는 5.7.5 열일곱자로 된 한 줄의 정형시로 일본의 에도시대부터 생겼다고 한다. 이 시의 특징은 짧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짧다. 그래서 압축, 생략이 많다.
하이쿠를 읽는 독자는 그래서 생략된 것, 뒤에 감춘 것을 찾아내야 한다. 글을 읽는 데는 3초면 되지만 의미를 찾아내는 데는 아마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아니며 영영 그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모습은 보이고 마음은 뒤로 감춘다는 하이쿠가 전하는 것은 단순히 겉모양이 아니기에 숨겨놓은 인생의 묘미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를 펴낸 류시화 님은 명상서적을 읽다가 영어로 번역된 하이쿠 몇 편에 반해 원어로 직접 읽기 위해 혼자서 일본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 뒤로 30년 동안 읽고 모으고 번역한 하이쿠를 너무도 예쁜 형태로 만들어 내었다. 이 책을 만드는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인도 여행 중에도 편집자와 같이 원고를 살펴볼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게다가 책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편집자, 북 디자이너, 발행인 모두 하이쿠 시인이 되었다고.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를 모두 하이쿠 시인으로 만들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말이 짧아지고 생략되고 앞뒤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으니.
류시화 님이 고르고 골라 놓으신 하이쿠도 가슴에 남는 시지만 나에게는 해설이 또 다른 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촌철살인의 명문을 만날 수 있어 해설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내일은 이렇겠지 어제 생각한 일도
오늘 대부분 바뀌는 것이 세상일이라
- 데이도쿠-
하이쿠는 지적 경험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실존적 경험이라고 해설한 류시화 님의 지적대로 머리로 알아서 살아지는 세상도 그래서 나오는 시도 아니다. 그저 몸으로 느낀 대로 쓴 시고, 우리도 이런 시를 몸으로 읽게 된다. 이런 시를 읽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이런 것을 뭐 그렇게 안달복달 힘들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섣달 그믐날
정해진 것 없는 세상의
정해진 일들
- 이하라 사이카쿠-
하이쿠가 강렬한 이유는 비본질적인 것을 다 걷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본질적인 것을 걷어냈을 때 남는 것이 진리이고 진정한 '나'이다는 말에 크게 공감이 갔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내 머릿속에 남게 될 것 같은 하이쿠 한 편을 적어본다.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이 내게 주어졌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족쇄의 무게를 이 시로 털어버리고 싶다.
내것이라고 생각하면
삿갓 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져
- 기카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