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창래 지음, 나동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지금 당신들이 있는 곳이야"
이 책에 처음으로 나오는 대사다. 무려 50페이지가 지나서야 나오게 되는 사람의 첫 목소리다.
그리고 뒤 이어 이런 문장도 보인다.
당신들이 갈망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당신들이 봐야 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책이다.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이 책은 작가가 이야기에 중간에 쓰윽 끼워 넣은 다음의 문장처럼 아주 작고 소소한 이야기가 움직이고 팽창하며 이어진다.'우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할 때마다 끊임없이 팽창한다. 종국에 가서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마치 작가 자신도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하고 끝을 맺을지 모른다는 듯이. 그래서 독자는 더욱 궁금해진다. 주인공 판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판과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끝없이 반복한다.

작가는 가상의 미래 미국 사회의 삶을 그렸다고 한다. 이창래가 그린 미래는 세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 곳에 사는 것이 아니다.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있다. 이 세 계급, 혹은 세 지역을 일컫는 말은 차터, B-모어, 그리고 자치주다. 주인공 판이 살아가던 곳은 차터(지배계급)에게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납품하며 나름대로 안정되게 살아가는 B-모어 지역이다. 판은 이곳에서 수조에 들어가 물고기를 키우는 잠수부다. 이야기는 어느 날 그녀의 남자친구인 레그가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그녀와 레그의 관계를 보면 레그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이유로 떠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 그는 모든 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C-질환의 저주로부터 벗어난 인물일 뿐이다. 판은 레그를 찾기 위해 떠난다. 판은 그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휴무일 여행 일정을 짜던 사람도, 음료수와 과자를 챙긴 사람도 스쿠터를 몰았던 사람도 그녀였다. 그녀의 출발 뒤에는 레그에 대한 사랑, 갈망이 있었다.

 

작가가 그린 미래사회는 지금 우리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들이 과연 그대로 존재할까? 아니다. 오히려 뒤로 후퇴한 듯 보인다. 자유와 인권과 평등과 개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안정감을 추구하며 고착화된 사회였다. 그것은 거꾸로 이 미래사회를 이끌어 가는 연료는 '위험'이었던 것이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숭고한 가치를 잃어버린 사회였다. 이런 모습이 문득 우리의 현재 삶과 겹쳐 보인다. B-모어 지역 사람들은 신념을 실천하는 일은 없다. 실용적인 관심만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한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들을 지지하는 대단히 중요한 시스템도 없다. 신도 없다. 당국의 규정을 준수할 뿐이다.


그런 곳에서 판은 딱히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이유로 이들에게 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그들의 미래, 심지어 자치주에 사는 외면당한 영혼들조차 미래의 씨앗을 본다. 판은 우리가 흔히 설정하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다. 판은 예언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이끌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의 대담성은 그녀를 그저 앞으로 밀고 나간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 발견한 그 자리에 굳건하게 고정시켰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녀를 휘둘리게 만들지도 영웅적이고 현명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우리들처럼 운과 적의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탄하거나 맞서싸우거나 불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만조의 바다처럼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독자가 쫓아가고 있던 판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차터 지역에서 언젠가 차터 지역으로 계급을 이동했던 사촌 오빠를 찾게 되는데 그 오빠의 아내와 하는 이야기는 눈길을 끈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미칠 정도로 즐거워. 약간의 진정한 기쁨도 누리고 있고. 우리는 아직 많이 다투고 있고 그 사람은 모든 일을 수십 번이나 깊게 생각하는 통에 나를 미치게 만들어.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렇지? 이곳은 정말로 우리가 있어야 할 바로 그 장소야."

판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베티가 했던 말이 모두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바람에 더 가까웠는지 판단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오늘의 우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곳에 속해 있다고 믿든 그렇지 않다고 믿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갇혀 있거나 구속된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 있어야 할 곳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지금 이 곳일까? 안정감이 있는 정해진 삶일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 속일까? 성역이 감옥이 되고 거꾸로 감옥이 성역이 되는 일은 제일 먼저 마음속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미래는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어떤 형태로? 우리가 꿈꾸고 믿고 행동하는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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