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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라는 제목은 자뻑의 수준이 아주 뻑가는 사람의 잘난체가 아니다. 이 말은 작가가 젊은 시절 사귀었던 괴팍한 여인이 그에게 한 말이다. 다혈질에 변덕이 죽 끓 듯 했던 그녀는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그렇지 않으면 날 오래 참지 못할 테니까."라고 말했다.
작가는 시종일관 이런 식이다. 일면 쿨해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무심해보이기도 하다. 일상이 농담처럼 실없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책을 읽고 있는 독자를 키득키득 어이없게 만들다가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깊이의 사색으로 빠져들게 한다.
새벽 4시 20분. 느닷없이 30초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 소리에 놀라 깬 작가와 같이 사는 여자 친구는 30분 동안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딸이 밝혀낸 소리의 근원은 화재경보기였다. 온 집에 울려대던 소리는 각 방마다 설치한 화재경보기의 배터리가 동시에 다 닳아서였다. 여자친구와 딸은 자러 들어갔지만 작가는 화재경보기의 배터리를 다 떼어 낸 순간에 불이날 수 있다는 상상으로 심란하다. 그렇다고 배터리를 다시 끼우면 소리때문에 잠을 자지 못한다. 스스로 살아있는 화재경보기가 되기로 한다. 그러다가 예전에 존재하던 화재 감시요원을 생각한다. 밤에 화재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화재 감시요원이 그만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촛불이 넘어져서 대형화재가 발생하고 말았다. 작가의 생각은 여기에서 세계3대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 블루스','스탠다드','푸어 비치'에게로 간다. 이들은 늘 자신들은 화재나 사고등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으며 그저 일종의 알람 경보기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작가는 예전 화재 감시요원과 이들이 같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피로를 선사하는 것은 화재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공포와 알람 경보기의 계속되는 경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우리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 내 뜻대로 상황이 혹은 사람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견딜 수 없이 힘든 삶이라는 데 좌절한다. 아주 사소하게는 짜증과 욕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견딜 수 없을 때는 사랑만이 도움이 된다. 심지어는 암이라는 질병도, 가난이라는 상황도. 그렇게 사랑하다보면 보다 의연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다른 길이 보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