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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에곤 쉴레의 그림은 불편하다. 투명인간의 표지에 있는 에곤 쉴레의 그림 또한 마찬가지로 불편하다. 그의 그림은 적나라하다. 솔직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가 표현한 인간의 몸에서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림이 우리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쉴레의 그림은 '네 모습을 똑바로 보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성석제의 <투명인간>이 그렇다. 제3자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주인공 만수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1960년대 개운리하는 마을에서 태어난 만수는 착한 바보처럼 식구들에게 친구들에게 회사 동료에게 당하고만 사는 것처럼 보인다. 책을 읽는 독자는 만수를 둘러싼 인물들 중 누구 하나일 수밖에 없다. 고무나무에 칼질을 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 비겁한 친구일 수도 있고, 형의 돈을 야금야금 가져다 쓰고도 형이니까 당연하게 생각한 이기적인 동생 일수도 있다. 필요할 땐 입속의 혀처럼 굴다가 이용할 가치가 없어졌을 때는 누구보다 냉정하게 뒤돌아서 버린 동료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가 상처 입힌 누군가를 닮은 만수는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 입고 미련하게 믿음과 사랑을 거두지 못하고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살아간 인물들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우리와 우리의 동생 그리고 아들들이다. 이들이 그려내는 사회와 이 시대를 살아간 개인의 아픔은 작은 붓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피와 살을 파고든다. 날림으로 지은 집에서 마신 연탄가스에 쓰러진 누나들을 업고 뛰는 만수와 하나밖에 쓸 수 없는 산소통에 집안의 기둥이었던 큰누나를 먼저 넣느라고 바보가 되어버린 작은 누나. 혼분식 장려운동에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오히려 벌을 서는 웃지도 못할 이야기, 다 쓰러진 회사를 지키는 노조원들에게 오히려 부과되는 손해배상, 잘 살게 되자 마음이 변해버린 형제, 자신들과 다르다고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아이, 우리 모두의 적나라한 이야기이기에 아프고 무겁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서서히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니 어쩌면 투명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의 처음에 마포대교로 향하는 한 인물은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존재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스스로를 투명하다고 믿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착각, 맹신, 오해이거나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거나. 사람들은 그런 데서라도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 하니까. 신화와 동화, 민담은 그래서 생겨났다. 이룰 수 없는 희망을 이야기로 바꾼 것이다. 이야기는 비록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달콤한 위로가 되어준다. 그래서 허망한 줄 알면서도 인류는 아직 이야기로부터 젖을 떼지 못 했다.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고 한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게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게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이라고. 하지만 독자는 안다. 억지로 위안을 주려 하는 소설과 우리와 함께 있어주려 하는 소설을. 그래서 아프고 슬픈 이야기지만 함께 있어주어 위로가 되는 <투명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