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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얼마큼 작으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김수영
이 책을 옮긴 남진희님은 김수영의 이 시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인 팽선생은 그마저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차례임에도 불구하고 택시에 먼저 오르는 자에게 화도 못 내고 자신을 팽선생에게서 떼어내려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2천 프랑의 돈을 받고 그들과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채식주의자임에도 그들과 함께 고기를 먹는다. 창피함과 분노를 느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못하는 팽선생은 세사르 바예호의 딸꾹질을 멈출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그는 바예호를 통해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의 의도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방해를 받는다. 결국 팽선생은 바예호를 구하지 못하고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단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볼라뇨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썼을까?
이 소설은 1938년 4월 6일 파리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4월 20일에 끝이 난다. 소설에 등장하는 딸꾹질하는 세사르 바예호는 스페인 내전에서 전체주의자 프랑코에 맞서 싸우던 젊은이들(국제 여단)을 지원했던 페루의 시인으로 실제로 1938년 46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죽었다. 이 세사르 바예호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1936년에 있었던 스페인내전의 패배를 배경으로 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생각을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서술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맨 뒤에 첨부된 듯한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팽선생 또한 전쟁으로 인해 몸이 망가진 존재로 스스로 오로지 삶에 대한 의지 하나로 살아났고 몇 푼 안되는 장애인 연금을 받으며 사회에 저항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비학(최면술, 침술 등)에 몰두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볼라뇨는 전쟁에서 최전방에서 싸우는 사람도 후방에서 고통받는 사람도 어찌 되었건 가난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저항의 증거인 바예호는 병원에서 딸꾹질을 하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그를 구해내려는 의지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의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볼라뇨는 살 속에 숨어있는 뼈를 보여주는 퀴리 부인의 X레이처럼 최면술로 의식의 너머 숨어있는 무의식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당시 전쟁 속에 내상을 입은 인물들의 정신을 보여준다. 김수영의 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겁하게 살았으며 실제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서도 그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바예호의 삶이 아니라 무기력하고 비겁해 보이는 팽선생을 통해 볼라뇨는 부끄러운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