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니와 애니 창비세계문학 12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백낙청.황정아 옮김 / 창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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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D.H.로렌스를 알기 전부터 채털리부인의 사랑이라는 야한 영화의 제목을 들었다. 그 영화의 원작자가 로렌스라는 걸 알고는 그 작가의 책을 읽어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의 선입견이 의외의 일로 깨지듯이 로렌스에 대한 편견 또한 <패니와 애니>로 깨지게 되었다.<패니와 애니>는 창비에서 다시 펴낸 로렌스의 단편집으로 두 명의 번역가(백낙청,황정아)의 작품을 모아놓았다.

백낙청씨는 다소 진보적인 학자로 알고 있었고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으로 민족문학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해서 그 명성을 익히 들었던 분이라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지만 백낙청씨는 하버드대학에서 D.H.로렌스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작품집에는 국화냄새,목사의 딸들,프로이센 장교,당신이 날 만졌잖아요,패니와 애니,눈먼 남자,해가 수록되어있다. 이 단편들을 읽으면서 로렌스를 평한 한 문장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중단편 소설의 거장"

작품 하나 하나가 꼭꼭 씹어 차분히 음미하면서 읽어볼 만한 것들이었고 섬세한 문장들이 오랜 세월의 흐름을 비껴간듯이 지금도 살아있었다. 특히 로렌스가 표현한 인물들은 인간의 내면적인 고독과 방황, 통념과 이상의 어디쯤에 머물고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탄광일을 마치고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는 주인공이 식탁에 국화꽃을 꽂아두지만 남편은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남편의 시체를 묵묵히 닦으면서 이 여인이 느끼는 현실과 내면의 목소리는 불안하고 슬프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당번병에 대한 동성애적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않아 오히려 더 잔혹한 행위를 하는 장교와 군기때문에 억압된 심리를 가지고 대하는 당번병의 비극적인 죽음은 금기와 욕망사이에 놓인 힘없는 인간을 보여준다. 품위와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속에서 오히려 전락하는 길을 택하는 패니는 야망도 없고 그저 노동자에 불과한 해리와 결혼을 하기로 한다. 객관적인 조건을 모두 맘에 들지 않지만 신선한 육체적 매력에는 저항하면서도 끌리는 어쩔 수 없는 본능에 해리가 애니라는 여자를 임신시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결혼을 결심하다.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지만 같이 살기 힘들어하는 부부는 이별을 결심하고 여자는 지중해의 해가 있는 곳으로 떠난다. 해를 향해 스스로를 개방하고 그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경험하는 육체적인 변화, 거기에 따른 정신적 변화. 님프처럼 변해가는 여인과 현실의 남편,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으로 여인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발칙하고 당돌한 여인들, 세상의 사고방식을 거스르기도 하지만 때론 운명에 순응하면서 온 힘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이제 로렌스의 다른 작품들- 아들과 연인,채털리 부인의 사랑 - 도 읽어볼 수 있겠다. 선입견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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