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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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비가 주말내내 내렸다. 비오는 주말 베트남 작가인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을 읽으면서 나는 베트남의 이름모를 정글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피비린내가 물씬나고 뿌연 비안개속에서 나무도 풀도 군인들도 그리고 전쟁의 포화속에 쓰러진 시체들조차도 축축히 젖어있는 그 정글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 책의 감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책이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왔는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책은 1991년 '사랑의 숙명'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나오자 마자 뜨거운 환영과 찬사를 받았다.그러나 그해 최고 작품상최종심에서 공산당과 행정관료조직의 소동속에 수상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런데 최종심심사위원교체라는 극적 반전을 통해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1993년 원래의 제목 <전쟁의 슬픔>으로 다시 책이 나와 불법복사판까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이 베트남과 베트남 민족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이용되고 있다고 판금조치와 함께 불법복사판들도 수거되고 도서관에 소장되었던 책들마저 폐기처분되어 12년동안 베트남 어디서도 책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2005년 해금이 이루어져 독자들의 입소문으로 이 책은 16개국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고 2008년 헐리우드영화계가 판권을 사게 된다. 그러나 제작자측이 바오닌이 요구한 내용수정을 거부하며 바오닌과 결별하고 만다. 영화는 어떤 모습으로 나오게 될까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황스러웠다. 포탄이 터지는 전쟁속의 상황이 서술되다가 느닷없이 학교다니던 때 이야기로 훌쩍 넘어가버리고 또 과거이야기가 한참을 서술되다가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되곤한다. 순서도 없고, 여기가 글의 시작인가 싶으면 글의 마지막이다 싶기도 하다. 어떤 이야기가 갑자기 끊기기도 하고 깨끗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읽다보니 전쟁의 참혹함과 슬픔의 이야기에서 이보다 더 알맞은 방법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속 이 이야기에 끌려 결국은 끝까지 끌려와 버렸으니까.

 

 1965년 이제 겨우 열일곱의 그의 생이 시작되는 봄. 끼엔은 그 어두운 시대 그 차가운 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프엉, 순결한 영혼으로 항상 밝게 빛나고 진실되고 열정적이었던 그녀와 끼엔은 끼엔이 전쟁에 참가하면서 헤어지게 된다.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지만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참여. 그 전쟁으로 인해 둘 사이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무언가가 바뀌었다. 또렷하고 심각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제 침묵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생겼다. 프엉은 미련없이 벼랑에서 뛰어내려버린 여자였다. 경멸적이고 담담하고 냉소적이 태도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버린. 구원할 방법도 없이 순식간에 낯선 여자로 다른 여자로 변해버린 여인이 되어버렸다.

 길잃은 시대에 표류하는 세상의 딸이 되어버린 프엉과 시대에 걸맞는 아들이 된 끼엔의 사랑은 서로 다시는 이어질 수 없는 침묵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사랑이 되어버렸다.

 전쟁때에는 분명히 알았던 것이 이제는 전혀 모르는 일이 되어버린 끼엔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몰라 글을 쓴다. 잊기위해 쓰고, 기억하기 위해 쓴다. 의지하고 구원받기 위해,견디기 위해, 간직하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글을 쓴다.

 

  전쟁은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의 죽음과 비인간적이 폭력도 승리했다.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지지만,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 생활수준은 예전으로 회복되지만 정신적 재산,내면적 삶의 가치는 한 번 무너지거나 부서지고 나면 누구도 처음의 순수한 시절로 되돌리지 못한다.

 

  전쟁이 끝나고 분도도 잊혀지고 단지 슬픔, 거대한 슬픔, 살아남은 자의 슬픔만이 남아있다. 좋은 전쟁이든 나쁜 전쟁이든 전쟁은 슬픔을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갈구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한동안 책속의 연인과 베트남의 전쟁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여행의 기회가 있다면 하노이와 정글을 보고 싶다. 그리고 베트남어로 된 <전쟁의 슬픔>도 한권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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